1월 19일 주일예배
믿음의 기도 (1)
야고보서 5:13-18
들어가는 말
신자가 질병을 만나면 당연히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합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서 병든 몸과 마음을 요술방망이로 마술을 부리듯 모두 다 치료해주시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치유를 위한 기도에 효력과 응답이 언제나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질병과 치료의 경계에서 기도하고 있는 신자들의 갈등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 15절은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는 약속의 말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병든 자를 일으키는 믿음의 기도’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이를 위해서는 기도의 기초에 대해서 점검할 필요가 있고, 기도에 담긴 치유의 약속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1. 기도의 방법: 믿음으로
‘믿음의 기도 the prayer offered in faith’, 즉 ‘믿음으로 드려진 기도’입니다. 야고보서 1:6절은 말씀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하이델버르그 요리문답 120문 주기도문에 관한 교훈에는 이렇게 나옵니다. “120문: 그리스도께서는 왜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부르라 명하셨습니까? 답: 그리스도께서는 기도의 첫머리에서부터 우리 마음에 하나님께 대하여 어린아이와 같은 공경심과 신뢰를 불러일으키기를 원하셨는데, 이것이 우리의 기도의 기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아버지가 되셨으며, 우리가 믿음으로 구하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 부모가 땅의 좋은 것들을 거절하지 않는 것보다 훨씬 더 거절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신자의 기도에는 원칙과 방법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기도자의 마음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이 직접 작성했던 제네바 교리문답에는 총373문 중에서 233부터 295까지 많은 분량의 내용이 기도에 대한 교훈으로 배정되어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기도는 영과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240). 기도의 마음은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244). “이것은 우리가 너무 어리석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야만 하는데, 성령께서는 우리를 인도하시어 말할 수 없는 탄식을 하도록 만드시며 우리의 마음 속에 하나님께 간구하고자 하는 마음과 열정을 만들어 주십니다(롬8:26).” 개혁자들에게 기도란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께서 주시는 마음과 열정으로 간구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성령으로 거듭난 신자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은혜이며,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마음으로 가능합니다. 이러한 원칙으로 볼 때, 기독교의 기도와 다른 기도의 형태를 몇 가지 살펴봅시다.
첫째는 자연적 신비주의입니다. 주변 세상의 아름다움, 기쁨과 능력에 대해 열려 있고 자신을 비우면서 경험하는 신비한 종교적 체험 등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관상기도, 명상, 선 등이 이에 속합니다.
둘째는 이교주의적 기도입니다. 그들의 신은 매우 가까이 있지만 변덕스럽고 심술궂으며, 신의 마음이 상하지 않게 잘 보여여하고 제물을 드려 달래야합니다. 윤리보다는 이기적인 축복을 신으로부터 받습니다. 토속신앙이나 무속종교에서 보여지는 신관입니다.
셋째는 유대인들이 갖고 있는 초월주의입니다. 하나님은 전능자이시고 거리감이 느껴지고 때로는 자신을 대항해서 싸우기까지 하시는 정의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으로 중요하지만 친밀감이 없습니다. 유대인 철학자 스피노자는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보상을 기대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넷째는 물질주의입니다. 기도의 모든 관심이 물질, 즉 이 세상의 것으로만 가득 차 있습니다. 거듭난 영혼의 자의식은 없습니다.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자신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발견하는 행복은 없고, 오직 이 세상의 요소들이 이러한 기도자들의 행복입니다. 뉴에이지, 신념론, 마술 등에서 말하는 소위 ‘끌어당김의 법칙’ 등입니다.
2. 방향 바꾸기 : 고난당하는 자, 병든자 – 기도하라
본문 13, 14절은 말씀합니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고난이 왔을 때 기도하라고 합니다. 병들었을 때 교회 장로들을 청하여 함께 기도합니다.
기도의 첫 단계는 방향 바꾸기입니다. 성경에서 회개라는 말은 메타노니아, 즉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인생의 어떤 중요한 사건이 커다란 인생 전환의 기회를 만들어 주었을 때 그것을 가리켜 메타노니아라고 합니다.
기도에서 참회는 눈물을 쥐어짜듯 잘못한 일들을 열거하면서 후회의 감정을 쏟아 놓는 것 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생각과 삶의 방향을 하나님께로 향하여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제목들을 잘 살펴봅시다. 기도의 응답이란 무엇일까요? 기도 제목들이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해결되는 것입니다. 이런 관계의 기도는 나의 계획이 우선하고 하나님은 나의 계획을 도와주는 존재가 됩니다. 이런 기도의 중심은 언제나 자신에게 있습니다.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는 깊은 관심이 없습니다. 종종 이런 기도 속에서 우리는 방향을 잃습니다.
질병과 실패, 고통과 슬픔이 우리를 기도의 자리에 몰아 넣었을 때, 우리의 모든 생각과 눈의 초점이 그곳에 집중하고 있는 동안 우리의 기도는 방향을 잃습니다. 기도의 자리에서 사단의 속임수에 영적 방향 감각을 잃고 있는 아이러니가 생기고 있는 겁니다.
하박국 3:16에서 선지자의 교훈을 살펴봅시다.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환란의 소식을 들었을 때 ‘창자가 흔들리고, 입술이 떨립니다. 환란 날의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 왔고, 집에서도 덜덜 떨립니다.’
이 때에 하박국 선지자는 문제에 집착하지 않고 하나님께 눈을 돌려 방향을 바꿉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19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합3:17-19)”
국가 전쟁으로 황폐해진 주변을 둘러보니, 보이는 것이라고는 기근과 질병과 죽음 뿐입니다. 그런데도 이를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에 대한 환상이 그 슬픔을 이기고, 회복에 대한 강한 소망을 갖도록 합니다.
우리가 어려운 환란에서 하나님께 온전히 내어 맡기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황폐함을 허락하실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결코 풍성하지 않은 환경에서 하나님의 풍성한 공급이 의심되고 힙겹습니까?
부족함이 없는 삶은 무슨 일이 일어나든 온전히 만족하고 한결 같은 삶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저 이를 악물고 버틴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실제로 치료하시고 공급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공중의 권세를 잡고 있는 사단이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면서 믿지 않는 자들이 믿지 못하도록 훼방하고 사망의 권세로 죽음을 두렵게 하면서 권력을 휘두르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자를 해할 권세가 없습니다.
부족함이 없는 삶은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삶입니다. 시편 23:1,4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자의 삶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노화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질병이나 굶주림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사람이나 피조물을 두려워하지 않고, 소유 잃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두려움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두려움 없이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방향 바꾸기에 성공한 신자의 모습입니다.
마태복음 26장 39, 42, 44절에 보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의 세 번의 기도가 있습니다. 기도의 중심이 문제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고 십자가의 고난을 위한 준비가 끝납니다. 누가복음 22장 44절에는 그 기도의 모습이 보여집니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몸 속의 모든 피를 다 쏟아 내는 듯한 전력을 다하는 기도의 목적은 ‘방향 바꾸기’였습니다. 역사의 거대한 방향 바꾸기,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에서 사단과의 영적 전투는 결판이 났습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의 끝에 하나님의 승리가 확증되고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3. 완전한 치유 : 죄사함
삶의 고통과 질병은 죄와 타락의 결과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신자를 거룩하게 하시는 구원은 총체적이며 전인적입니다. 총체적이라 함은 우리의 영혼과 육체의 구원이 분리되지 않고 총체적인 구원임을 의미하며, 전인적이라 함은 우리의 지정의를 포함하는 전 인격적인 구원을 의미합니다. 이 전체적인 구원의 의미에 우리가 겪는 질병으로부터의 회복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중풍병자를 고치실 때 ‘네 죄사함을 받았다’고 말씀하심으로 죄사함과 치유가 연결되어 있음을 보이셨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죄를 씻으실 때 삶의 고통과 질병으로부터의 치유 또한 이루어졌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새롭게 하셔서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신자들의 삶이 생명으로 충만하고, 생명을 얻되 더 풍성히 얻기를 원하십니다. 십자가로 죄를 씻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셨을 때 하나님은 모든 죄악과 타락의 영향으로부터 우리의 영혼 뿐만 아니라 육체 또한 회복하셨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자녀를 해할 수 없습니다.
사탄과 귀신은 ‘믿지 않는 자’들 가운데 역사하면서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게 하고, 거짓으로 속이며, 더욱 타락하도록 만듭니다. 그것은 ‘영적으로 죽은 자’들 중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사단과 귀신에 대한 중요한 오해가 있습니다. 사단이 하나님을 떠나 죄를 짓고 타락했지만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세를 떠나 사단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영적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 사단은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된 신자’들에게 사단은 권세가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사단은 모든 권세를 상실했습니다. 그리고 구원 이후 사단은 ‘신자의 머리털 하나도 상하게 할 수 없습니다.’
회복의 과정성
그러면 우리는 묻습니다. 그런데 왜 성도에게 아직도 삶의 애환이 존재하고, 질병의 고통은 떠나지 않고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삶의 과정성 때문입니다. 신자가 죽고 부활을 경험하기까지 우리는 ‘아직’ 완전함을 향한 과정에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성화가 이생에서는 불완전하다는 뜻입니다. 불완전하다 함은 구원이 불완전하다는 뜻이 아니라, 타락 이전의 사람이 영생으로 가는 과정이 있었듯, 거듭난 새사람은 부분적으로만 완전하고, 이생에서는 영적인 발전의 정도가 불완전한 상태로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질병과 치유도 같은 이치입니다. 우리의 몸은 완전한 회복을 향한 불완전함 속에 있으므로 때로는 치료의 지연이 있고, 때로는 급속한 치료도 나타납니다. 이 단계에서 신자는 성령님과 함께 기도와 지성으로 협력하며 성화를 이루어 갑니다. 이것이 치유의 신비입니다.
이사야 53장 5,6절의 약속이 이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심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치유를 받았습니다. 그 치유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이미 이루셨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죄를 씻으시고 거룩하게 하셨을 때 ‘치료하시는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고치셨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믿는 것입니다. 실제로 믿는다는 것은 그것이 사실인 것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 무엇이 사실인 것처럼 행동한다는 것은 그것이 사실인 것처럼 산다는 뜻입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할 것이며 주께서 저를 일으키신다고 하십니다.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고 합니다. 죄사함과 함께 하나님의 치유는 이미 우리 안에 강하게 역사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믿으십시오. 그리고 ‘믿음의 기도’를 하십시오.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신비가 결과로 나타날 것입니다(약5:15-16).
빙점으로 유명한 작가 미우라 아야코가 헌신된 크리스챤이었습니다. 암으로 투병하다가 결국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그녀는 그런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 당신은 언제나 옳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고, 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병은 고쳐지지 않았지만, 신뢰가운데 마음의 짐은 고침받았습니다. 병 때문에 기도하다가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고쳐주시면 감사하고, 안고쳐주시면 또 다른 방식으로 내 삶에 개입하시리라 믿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