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기도 (2)

1월 26일 주일예배

믿음의 기도 (2)

야고보서 5:13-18

들어가는

지난 주에 ‘믿음의 기도’에 대해 일부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믿음의 기도’는 ‘믿음으로 드려진 기도’이며, 주요 내용을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기도는 영과 마음으로 하는 것인데 기도의 마음은 인간의 본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신자에게 기도의 마음과 열정을 만들어 주시므로 기독교인들에게 기도는 전적으로 하나님 중심이며 인간 본성에 중심을 두는 타종교의 기도와 구별됩니다.
둘째, 기도의 첫 단계는 방향 바꾸기입니다. 문제 중심에 있는 동안 기도는 기도자 중심이 됩니다. ‘믿음의 기도’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기도자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방향 바꾸기를 성공한 기도입니다.
셋째, 삶의 고통과 질병은 죄와 타락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의 영혼과 육체 전체와 전인격에 효력을 발생합니다. 하나님의 속량하심에는 질병과 고통으로부터의 회복 또한 포함되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오늘은 지난 주에 이어 ‘병든 자를 일으키는 믿음의 기도’에 대해 세 가지 작은 주제를 더하여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첫째는 믿음의 신비, 둘째는 주권 되돌리기, 셋째는 감사와 사랑입니다.

 

1. 믿음의 회복

믿음은 단회적 믿음과 점진적 믿음이 있습니다. 단회적 믿음은 법정적인 용어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단회적입니다. 한 번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점진적인 믿음은 ‘신뢰’라는 말이 더 가깝습니다. 경험을 통해 성장하고 배움을 통해 확신을 갖습니다. 고통을 통해 말씀이 인격화되고 경험을 통해 성령의 임재의 경험이 깊어집니다.
마태복음 17장14절에 보면 귀신들린 아들을 둔 아버지가 예수님께 나옵니다. 제자들이 고치지 못하여 예수님께 나온 겁니다. 그 아들을 치료하신 후 제자들이 묻습니다. ‘우리는 왜 고치지 못했습니까?’ 이 때 20절에서 예수님은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산을 옮기는 믿음’은 야고보서의 ‘믿음의 기도’와 관계가 있습니다. 성령께서 신자를 거듭나게 하신 후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신자의 영과 마음으로 기도하고 성령께서 주신 그 마음에는 ‘산을 옮기는 믿음’이 있어야 맞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구원이후 아직 신자의 삶에 남아 있는 타락의 영향 때문입니다. ‘이미’ 주어진 구원이 ‘아직’ 완전하지 않은 과정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산을 옮기는 믿음’은 야고보서의 ‘믿음의 기도’와 관계가 있습니다. 성령께서 신자를 거듭나게 하신 후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신자의 영과 마음으로 기도하고 성령께서 주신 그 마음에는 ‘산을 옮기는 믿음’이 있어야 맞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신자의 믿음이 죄와 타락의 영향으로부터 방해를 받기 때문입니다. ‘이미’구원의 은혜를 입었지만‘아직’완전하지는 않습니다. 옛사람과 새사람의 치열한 갈등이 신자의 믿음을 무력하게 만듭니다.
일부 학자들에게서‘인간의 무력감은 한계성에 대한 학습된 암시의 결과’라는 의견들이 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첫째는 유전자 성장 실험입니다. 같은 유전자를 가진 줄기세포를 몇 가지 다른 환경에서 성장시켰습니다. 각기 다른 환경에서 성장한 같은 유전자 세포들은 모두 다른 성장과 결과를 보여주었습니다. 생물의 성장은 완전한 유전자의 지배 아래 있지 않고 환경의 요소가 더 많음을 증명했습니다.
둘째는 해리성 정체감 장애(DID)라는 다중인격 장애, 일종의 정신병의 예입니다. 어떤 이유에서 환자는 자신과 전혀 다른 사람의 특유한 인격과 행동특성을 보여줄 때가 있습니다. 인격의 전환에서 환자는 정신병리학적 특성만이 아니라 생리적 변화도 수반되는데, 알러지나 흉터가 없어지기도 하고 예민한 성질이 사라져 버리기도 합니다. 이 관찰을 근거로 ‘마음이 어떻게 뇌를 조종하여 면역체계에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연구 분야인, 심리신경면역학 (Psychoneuroimmunology)이 생겨났습니다.
셋째는 아기의 성장과정에 미치는 부모나 영아기 환경이 주는 잠재적 암시의 영향입니다. 아기는 2세까지 환경으로부터 잠재의식이 형성됩니다. 모든 아기들은 위대한 가능성을 가진 사람으로 태어나 부모나 환경에 의해 ‘조련된 코끼리’처럼 바뀝니다. 어릴 적부터 밧줄에 묶여 멀리 움직여보지 못한 코끼리는 어른이 되어서도 기둥에 묶지 않고 밧줄만 걸어두어도 멀리 가지 못하는 거대 동물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질병의 본질은 신체의 자연적인 조화가 무너질 때 우리가 경험하는 불편함(dis-ease) 이라고 합니다. 선천성 질병이 아니라면, 외상과 독성물질, 그리고 불편한 마음이 뇌와 신체 세포, 조직, 장기 사이에 교환되는 정보를 왜곡시키게 되면서 질병이 유발됩니다. 그 질병의 3분의 1은 플라시보 효과로 치료되고 70퍼센트는 노시보 효과로 질병이 발생하고 악화되기도 합니다.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브리서11:3)”

자기 부인과 믿음의 회복 :
누가복음 9:23에 보면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서 ‘자기부인’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과 연결됩니다.
요한복음 9장 1-3에 보면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자들은 ‘누구의 죄 때문인지’ 묻습니다. 주님께서는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고 대답하십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맹인이 되도록 만드셨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맹인이 건강하게 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초점을 두어야합니다.
‘자기 부인’으로 세상의 영향을 이기십시오. 주님께서 세상을 이기셨으니 신자들도 그 권세를 갖고 있습니다. 그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선’을 바라보십시오.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질병이나 재난을 만났을 때, 유전병, 유아시절 부모나 환경으로부터 학습된 잠재의식, 예기치 않은 천재지변, 사고, 유행병 등 많은 경우가 자신의 죄악 때문이 아닌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류의 원죄와 타락의 결과이며 그 영향임은 분명합니다.
신자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새 마음 새 사람입니다. 아직 남아 있는 죄악의 영향들을 ‘자기부인’으로 넘어서야 합니다. 주님은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산을 옮기는 믿음’으로 뛰어 넘어서야합니다.
‘자기부인’은 우리의 죄성과 타락의 영향과 연결되어 있는 자신의 집착과 두려움을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된다(롬8:28)’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것입니다. 철저한 ‘자기부인’을 이룬 사람 만이 ‘하나님의 선’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는 분입니다(마7:11). 하나님은 종국에 나를 위해‘가장 좋은 선’을 이루실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자기부인’은 고대 동양종교의 ‘내려놓음’이나 ‘무아지경’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숙명론적인 나태함이 아닙니다. 나태함은 불신앙으로부터 나오는 부정적인 행동입니다.‘자기부인’은 오히려 적극적이며 말씀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벧전5:7). ‘자기부인’은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께서 하시도록 주권을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일이 가능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신자는 오히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신뢰를 가지고 ‘하나님의 큰 일’에 도전합니다(빌4:13).
예수께서 교훈하신 ‘자기 부인’은 철저한 자기 발견에 기초합니다. 시편51편의 다윗의 심정이 그렇습니다.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죄와 속량을 경험한 신자는 깨끗한 마음과 구원의 즐거움을 만나게 되고 자유와 충만을 경험합니다.
간혹 우리는 문제를 겪을 때 그 문제가 너무 크게 느껴진 나머지, 마치 안대로 눈을 가리고 앞을 보지 못한다는 착각에 빠진 듯 행동합니다. 이전에는 어둠 속에 있었으므로 눈을 뜨고 있어도 앞을 보지 못했지만, 지금은 밝은 빛 아래 있으므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을 가리고 보지 못하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구원 가운데 이루신 완전한 속량과 회복을 믿고 신뢰하십시오. 성령의 은혜로 사랑과 감사를 회복하십시오. 실제로 사랑하고 감사하십시오.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자연적인 회복과 치료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원과 함께 어두운 감옥의 문을 열어 두셨습니다. 자유를 느끼고 자유를 누리십시오. 어둠은 물러가고 광명이 찾아올 것입니다.
믿음의 회복이 필요합니다. 믿음의 회복은 결국 자신의 마음을 챙기는 일입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언 4:23)”

 

2. 주권 되돌리기

‘천국은 너희 안에 있다’고 했습니다. 신자 안에 ‘하나님 나라’가 존재합니다. 하나님의 권력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빛이 비추이는 곳에 어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신자는 모두 ‘빛의 자녀’입니다. ‘빛으로 나온 사람들’입니다. 더 이상 ‘어둠의 자녀’가 아닙니다. 더 이상 어둠 속에 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신자는 ‘새로운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믿어지는 것’입니다. 믿으려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믿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시고 거듭나게 하시면 생명을 갖게 됩니다. 생명은 살아있으므로 아는 것입니다. 둘째는 ‘애써서 성찰함으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율종교에서 말하는 ‘스스로 깨달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듭난 새생명은 자연히 하나님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힘쓰고 애써서 하나님을 알고자 할 때’성령께서 내적 증거를 주십니다. 구하면 주실 것이고, 찾으면 찾아질 것이며,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입니다(마7:7).
하나님은 선한 분입니다. 악을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악이란‘선의 결여’입니다. 선이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입니다. 사람은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떠나는 것’, 즉 악을 선택했고, 악의 결과로 죄와 타락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열기와 냉기를 비교해보겠습니다. 열은 실제로 존재하지만 냉기는 열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최저온은 섭씨 -273도입니다. 열은 가열하면 계속 올라가지만 냉기는 절대 최저온도 이하로 내려가지 않습니다. 냉기는 열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속지 마십시오. 어둠은 실존이 아닙니다. 빛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신자는 빛으로 나왔고, 빛의 자녀입니다. 신자는 어둠 속에 있지 않습니다. 어둠이 주는 권세에 압도당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신뢰하고 ‘성령 충만’을 받으십시오. 그리스도의 평강이 자신을 주장하도록 하세요. ‘천국은 이미 우리 안에’ 있습니다. 사도행전 17:27-28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고, 우리는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때로 우리는 자존감 낮은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 왜 나를 이렇게 만드셨어요? 어떤 이유로든 자신의 인생이 원망스럽고 행복하지 않습니까? 이유가 뭘까요? 장애가 있거나, 병약하면 불행한 건가요? 극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장애로 태어난 헬렌 켈러나 스티븐 호킹 박사가 불행한가요? 잘생기고 준수하여 난봉꾼으로 살다 죽은 사람이 복이 있는 건가요?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너무 없다고 원망하는 사람이 떠나고, 너무 많아서 교만한 사람이 떠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불행하게 만든 적이 없습니다. 잘못된 세상의 가치관으로 스스로 불행을 자초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잘못된 생각은 바꾸고 잘못된 습관은 노력해서 바꾸어야 합니다.
때로 질병에 대해 불평을 합니다. 하나님 왜 나에게 질병을 주셨어요? 하나님은 질병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삶의 고통과 질병은 타락의 결과입니다. 창조시에 그러했고, 구원의 재창조에서도 같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총체적이며 전인격적입니다. 구원과 함께 하나님은 우리를 회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것을 누리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지금은 단지 잔존하는 육체의 영향 가운데 잠시 머물러 있을 뿐입니다.‘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롭도다(고후 4:16).’
‘나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나는 문제를 만들고 있습니다. ‘나는 문제가 없다’고 부인하는 순간 역시 나는 문제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두려움을 만들어 우리를 속입니다. 영적 충만을 잃게 만들고, 자존감을 무너뜨리고 고통을 가져옵니다.
베드로후서 3:5에는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합니다. 거짓 가르침에 우리가 속고 있습니다.
‘에고라는 적’의 저자 라이언 홀리데이는 젊은 나이에 성공과 실패를 경험하고 자신의 멘토가 무너져가는 과정을 지켜본 후에 깊은 자기 성찰로 이 책을 썼습니다. 그는 인생의 전환기에 반드시 버려야 할 한 가지가 에고라는 적이라고 합니다. 에고는 ‘자만심, 자기도취’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흔히 ‘자기 자신을 믿으라’는 말을 많이 듣고 자랐습니다. ‘자기 자신’은 정말 믿을만한 존재일까요? 우리의 잘못된 교육과 넘쳐나는 자기계발 서적들은 뜬 구름 같은 자기허상들을 헤아릴 수도 없이 만들어 냈습니다.
“나는 기업가다. 홀로서기를 꿈꾸며 독립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번에 승리할 것이다. 현재로서는 내가 선두이기 때문이다. 나는 작가이다. 무언가를 출판했기 때문이다. 나는 부자이다. 제법 많은 돈을 벌었기 때문이다. 나는 특별하다. 선택받았기 때문이다. 나는 중요한 사람이다. 그래야 한다고 내가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한 번 쯤 이런 생각에 빠져듭니다. 반드시 경계해야할 속임수입니다. 암탉이 알을 낳기 전에 병아리를 세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물고기를 잡기 전에는 그 생선 요리를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잘못된 자만은 자기 계발이 아니라 자신을 속이고 스스로에게 사기를 치는 겁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자기 부인’은 ‘우리 안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첫번째 단계입니다. 잘못된 구조물을 완전히 무너뜨리지 않으면 새 건물을 세울 수 없습니다. 당신의 마음에 하나님의 주권을 돌려드리십시오.

 

3. 사랑과 감사

골로새서 3:15은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를 주장하게 되면 ‘사랑과 감사의 마음’이 찾아옵니다.
‘하나님의 평강’은 ‘완벽한 평정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평화’이며 이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때, 우리에게 일어나는 변화는 ‘사랑과 감사’입니다. 사랑과 감사는 행동이 아니라 성품입니다. 사랑의 행동과 사랑의 성품은 다릅니다. 행동은 의지로 가장할 수 있지만, 성품은 본성이므로 가장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지 않아도 사랑의 행동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사랑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저 사랑하고 감사하십시오. 그것은 온갖 죄와 타락의 영향으로 각종 슬픔과 질병을 만들어내던 우리의 ‘옛 사람’이 갖지 않은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로서 신자 만이 갖고 있는’ 긍정적인 성품이며 거룩한 성도가 뿜어내는 영혼의 향기입니다.‘신의 성품’입니다(벧후1:4). 그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새 사람입니다(골3:10).
사무엘 스마일스는 “생각을 바꾸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을 바꾸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을 바꾸면 인격이 바뀌고, 인격을 바꾸면 운명이 바뀐다”고 했습니다. 생각은 행동 이전에 와서 행동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사랑과 감사의 행동에 집착하지 말고, 실제로 사랑하고 감사하십시오.
기도는 우리의 삶을 망치고 있는 생각과 마음을 바꾸는 과정입니다. 성경은 거듭 강조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베드로후서4:5)”
염려를 바꾸어 감사하십시오. 미움을 바꾸어 사랑하십시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일으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당신 자신과 병을 앓고 있는 환우들을 주장하게 하십시오. 그들을 결코 어둠에 내어주지 마십시오. 질병과 슬픔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당신을 압도하게 만들지 마십시오. 기도는 죽은 자를 살리고 병든 자를 일으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팀 켈러 목사는‘기도’에서 자신의 경험을 나누었습니다. 아내 캐시는 크론병으로 고생하고 있었고 자신은 갑상선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에 빠져 헤메던 어느 날, 아내는 제안합니다. 매일 밤마다 빠지지 않고 머리를 맞대고 기도를 하자는 겁니다. 가끔 한 두 번 하자는 것이 아니라 매일 그러자고 합니다.“만일에 불치병 선고를 받았다고 생각해 봐요. 의사가 약을 주면서 날마다 한 알 씩 꼭 먹어야 하고 거르면 몇 시간 안에 숨이 끊어진다고 경고했다면 어떨까요? 깜빡하고 지나거나 며칠씩 까먹기도 할까요? 우리는 어찌할 방도가 없어요. 반드시 기도해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