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의미

1월 5일 주일예배

기적의 의미

사도행전 2:36-47

들어가는

우리는 육체를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크고 작은 많은 병을 만나게 됩니다. 그 중에는 간단한 치료와 처방으로 회복되는 병도 있지만 치료방법이 없어서 그 병 때문에 죽거나 혹은 결국에는 몸에 장애를 남기고 마는 불치의 병도 있습니다.
병을 만나서 힘들 때는 우리의 신앙에도 깊은 굴곡이 찾아옵니다. 왜 나에게 이런 병이 찾아왔는가. 하나님은 왜 나에게 이런 병을 주셨는가. 내가 무엇을 잘못해서 이런 병이 찾아왔나. 온갖 생각에 낙심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한 달 정도의 기간을 두고 ‘신자들에게 있어서 질병’에 대하여 말씀을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성경은 모든 크고 작은 질병과 고난의 문제에 대해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라고 권면합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약5:13)”. 그러나 신자들이 질병을 위해 기도하는 것과 성경에서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보여준 표적 사이에는 엄연한 구분이 존재함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치유를 위해 기도’할 때 잘못된 기대나 비성경적인 치유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하고 성경에 기초하여 확신에 찬 기도를 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지식입니다.

 

1. 오직 믿음, 오직 성경

‘현대의 기적들을 믿을 수 있는가?’하는 질문에 존 맥아더는 말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항상 초자연적인 일을 행하고 계신다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자연과 인간사에 초자연적으로 개입하고 계십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자연적인 치료나 의학적인 치료와 관계없이 사람들을 고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나는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초대교회 이후로 조금도 약화되지 않았습니다. 구원은 항상 명백히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행위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은사주의자들이 추구하고 주장하는 기적이나 표적, 이적 등은 사도들의 기적과는 다릅니다.’(은사1, 167)
존 맥아더는 하나님께서 ‘계시의 전달자’들에게 표적으로 주셨던 기적과 오늘날 은사주의자들에 의해 사칭되고 있는 기적을 구분하기 위해 ‘계시 전달의 목적을 위한 하나님의 기적은 계시의 종료와 함께 종료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견해는 근대 장로교회 기초를 세웠던 아브라함 카이버의 경우도 비슷한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카이퍼는 그의 신학사전에서 “하나님의 계시는 모두를 위해 주신 것으로 보편적이고 충분합니다. 하나님의 계시의 능력을 보여주는 기적은 그 목적으로서 계시의 완성 이래 계속해서 일어날 수 없으며 또 실제로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벌코프 박사의 견해 또한 이를 지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인식하는 내적 원리는 ‘오직 믿음’이며, 그 믿음의 기초는 ‘성령의 증거’인데 그 증거란 ‘성경믿게 하는 사역’입니다. “성령의 내적 가르침을 받는 사람은 성경에 절대적으로 복종한다는 서과, 성경은 스스로에 대한 증거를 갖고 있어서 증명이나 논증에 굴복하고자 하지 않고, 우리가 성경을 받아들일 때 가져야 하는 전적인 확신을 성령의 증거에 의존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최종 근거는 오직 성경, 더 낫게 표현하면 성경의 증거로, 신자에게 새겨지는 하나님의 권위입니다… 성령의 증거는 믿음의 효과적인 원인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성령의 증거 때문이 아니라 성령의 증거를 통해 믿습니다.”(조직신학 198).
‘성령의 내적 증거’는 일부 신비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주관적인 경험이나 영적인 감정’이 아닙니다. 성령의 증거는 ‘새로운 계시를 끝없이 산출’하는 것이 아니라 계시로서의 성경을 확증하여 믿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직 믿음, 오직 성경’을 외쳤던 종교개혁자 칼빈의 사상이기도 했습니다.

 

2. 사도의 표적과 신자의 기도

우리가 성경의 치유를 이해할 때, 계시의 증거로서 사도들의 표적과 신자들이 일반 신앙생활에서 드리는 ‘치유를 위한 기도’는 구분이 있음을 잘 이해하는 것이 올바른 확신을 위해 도움이 됩니다.
오늘 성경은 초대교회의 초기 사역에 대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있었을 때 사도 베드로는 이에 대해 말씀을 중심으로 설교를 했고 이날 처음으로 삼천명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43절에 보면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들을 통해 나타난 표적’에 대해 주목합시다. 관련된 성경구절을 몇 군데 더 보겠습니다.
(행 5:12)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행 15:12)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께서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듣더니
(고후 12:12) 사도의 표가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요한복음 2:11) 예수께서 이(요한복음20:30-31)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성경에서 표적은 ‘단순히 자연 현상에 의해 설명될 수 없는 기적’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단순한 초자연적인 사건은 주변에 무수히도 많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표적은 반드시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의미를 가진 초자연적인 현상’으로서의 기적이 되어야합니다.
성경에서 표적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보내신 계시의 전달자가 하나님의 보내신 사람임을 증거할 때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초자연적인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표적은 초자연적인 사건과 하나님의 증거가 동시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 개혁주의 개신교회가 믿는 바는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오직 성경’입니다. 신자에게 신앙생활의 오직 하나의 기준은 성경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는 오직 성경 밖에는 없습니다. 그 계시는 성경으로 완전하고 충분하며 완료되었습니다. 더 이상의 계시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표적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 자신임을 증거’하는 목적으로 예수님께서 시행하신 사건입니다. 사도들의 표적은 ‘사도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았으며 사도들로부터 주어진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임을 증거하기 위해 성령께서 보여주신 사건이며 사도들의 사역과 성경이 완성됨으로 계시적인 사건으로서 표적은 종료되었습니다.
사도들의 표적이 계시(성경)의 완성과 함께 종료되었다는 교리적인 견해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를 믿지 않는다는 불신앙이 아님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오히려 신비적인 주관주의나 신비 유사체험 중심의 경험주의로부터 건전한 성경적 교리를 지키며 ‘오직 믿음, 오직 성경’을 외쳤던 종교 개혁자들의 바른 교리를 지킬 수 있는 입장임을 주지해야합니다.
신자들의 삶에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것은 종종 기도의 응답으로 오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하나님의 섭리에 해당합니다(로마서8:28).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3. 기도의 응답과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은 초월자인 동시에 내재자로서 거룩하시고 존귀하신 하나님은 지금 세상 속에서 우리와 함께 존재하십니다. 지금도 영혼을 창조하시며 세상을 섭리하십니다.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이셨고, 십자가로 대속을 이루셨습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구원을 모든 믿는 자에게 적용하시면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믿음을 주시고 성경을 깨닫게 하십니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보다 더 큰 기적은 없습니다.
불치병을 고치거나 천재지변으로부터 혹은 끔찍한 사고로부터 생명을 유지한 것이 기적일까요? 하늘에 구름이 예수님의 형상으로 보였으면 기적일까요? 동상에 피눈물이 흘렀으면 기적인가요?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을 잡신 취급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초자연적인 사건 자체에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거기에 담긴 하나님의 섭리와 성령의 증거에 주목합니다.‘성경 말씀을 기준하여 성령의 증거를 통해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할 때, 신자는‘모든 것을 합력하는 하나님의 선’을 만납니다.
신자와 하나님의 교회가 기도할 때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분명히 존재합니다(야고보서 5:14-15). 그 응답과 섭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계획에 의존합니다. 사람의 욕망과 계획에 의해 움직이지 않음은 너무나 자명합니다.
기도는 초대교회의 생활이었고 기초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그들은 모여서 오로지 기도에 힘썼다고 했습니다(행1:14)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오순절에 그들이 모인 곳에서 성령충만함과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는 역사가 나타났고 그날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삼천명이 주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때에도 그들은 오로지 기도에 힘썼다고 했습니다(행2: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사도행전 3장에서는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시간에 성전에 올라갈 때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 일로 체포와 심문을 당하고 돌아왔을 때 기도합니다. (행4:29-31)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사도행전 5:16에 “수많은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 계속해서 일어나는 복음과 부흥의 역사에 종교지도자들은 시기가 가득해서 사도들을 잡아 옥에 가두었는데 신기한 탈옥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옥은 든든하게 잠기고 지키는 사람들이 문에 서 있으되 문을 열고 본즉 그 안에는 한 사람도 없더이다(23절)”
다시 체포되어 채찍에 맞고 능욕을 받고 풀려났을 때 42절에 보면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사도행전12장에서 사도 야고보가 헤롯에 의해 순교당합니다. 유대인들이 이것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아서 옥에 가둡니다. 이 때에 12:5절은 이렇게 전합니다.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여기에서 ‘간절히’ 기도했다는 말은 ‘끊임없이’ 기도했다는 뜻입니다.
‘끊임없는 기도’ 기도는 초대교회의 유전자와 같습니다. 교회는 기도 속에서 태어나고 기도와 함께 성장했습니다. 예수님의 아우 야고보는 예루살렘의 감독이 되었을 때 ‘기도의 목회자’였습니다. 기도를 너무 많이 해서 그의 무릎이 낙타의 무릎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행1:14)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그가 그의 편지 야고보서 5:14절에서 증거했던 내용은 기도의 산 증인으로서의 증거입니다.
(야고보서 5:14-15)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요한일서 5:14-15)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