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바른 종말의식

12월 29일 주일예배

올바른 종말의식

요한일서 3:1-10

들어가는

한 해의 마지막 주간을 맞았습니다. ‘마지막 주간이다, 혹은 올해 마지막 날이다’ 등의 말을 하면서 한 해를 보내기는 하지만 우리의 삶에 그다지 큰 변화는 없을 겁니다. 어제가 오늘 같고 내일이 또한 오늘과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굳이 ‘마지막’이라는 단어로 묵은 해는 보내려 하고 새로운 해를 새로운 마음으로 맞이하고 싶습니다.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겠지요.
눈 덮인 깊은 산 속에 새가 한 마리 있습니다. 살을 에는 듯한 밤의 추위에 시달리는 새는 아침이 되면 따듯한 둥지를 지을 것이라면서 운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작 날이 밝으면 새는 따스한 햇볕을 쬐며 잠을 자는 것으로 하루를 다 보냅니다. 그렇게 새는 이처럼 평생을 속절없이 울며 산답니다. 사람들도 이와 똑같아서, 처지를 탓하면서 정작 변화의 기회가 오면 모두 흘려 보내고 마는 것과 같은 이치 같습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종말의식은 매우 중요한 내용입니다. 종말이라는 말자체가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마지막에 있을 역사적 사건이나 사람의 이름을 맞춘다거나, 주님께서 언제 재림하시는지는 알아 맞히는 것 정도를 기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기독교인이 갖는 종말의식은 그런 내용은 아닙니다.
기독교인의 종말의식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부귀영화와 만사형통이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이 이루어지는 영역입니다.
우리가 죽음의 관문을 지나 영생에 들어갈 때 완전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나라에 들어갑니다.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는 엄연히 존재합니다. 그러나 죄와 사망의 권세가 함께 섞여 있습니다.
개혁주의 장로교회의 교리체계의 근간이 되고 있는 하나님의 주권사상은 그런 의미에서 가장 종말론적인 교리체계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의 영향이 없는 곳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죄악의 타락과 부패의 영향 또한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습니다. 저 세상에서 완벽한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가 이루어지듯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가 미치지 않는 곳은 없습니다. 이 세상은 버려져야할 대상이 아니라 구원과 속량의 대상인 것입니다.
올바른 종말의식을 가진 신자라면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을까’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가’에 관심을 갖습니다. 어떻게 믿느냐에 따라 어떻게 사느냐도 결정됩니다. 올바른 종말의식은 역사 변혁을 이루는 힘이며 견고한 미래 소망의 기초입니다.
오늘 본문은 종말의식이 주는 세 가지 교훈을 보여줍니다. 첫째 천국의 현재성, 둘째 미래지향적 영성, 셋째 복음의 능력입니다.

 

1. 천국의 현재성

성경에서 육체적 죽음을 중심으로 현세와 내세가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개념으로 통합되고 있습니다. 이는 타락 전 사람의 상태에 대해 고찰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타락이전 인간의 원래의 상태에 대한 개신교의 입장은, 인간은 의와 거룩의 완전한 상태로 창조되었지만, 정도에 있어서는 아직 완전하지 않습니다. 이는 예비적이고 잠정적인 상태로서, 더 큰 완전성과 영광에 이를 수도 있고, 타락으로 치달을 수도 있습니다(벌코프 419).
이러한 견해는 칼빈 역시 같습니다. “진정으로 최초의 인간이 정직하게 유지되어 살았었다면 보다 나은 삶으로 넘어갔을 것이다. 그러면 거기에는 영혼과 몸이 분리되는 것도 없었을 것이며 부패도 없으며 멸망같은것도 없으며 한 마디로 말해서 부자연스런 변화는 없었을 것이다(칼빈주석 168).”
이해하기 쉽도록 예를 들어 봅시다. 엄마의 태중에서 자라고 있는 아기가 있습니다. 엄마의 복중에서 아기는 아직 보호가 필요하고 성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독립적인 생명을 갖고 사랑과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 생명입니다. 아기는 엄마의 복중에 있을 때나 출산하여 가슴에 안고 있을 때에나 엄마에게는 같은 아기입니다. 생명의 방식이 달라졌을 뿐, 엄마에게 사랑받는 아기임은 달라진 바가 없습니다.
천국의 현재성은 이와 같은 이치입니다. 천국은 본질적으로 현세와 내세가 다르지 않습니다. 현재는 과정성이 있어서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며, 내세는 완전성이 있으므로 ‘이미’ 이루어진 모습입니다.
타락이후에 ‘흙으로 돌아가리라’는 말은 완전한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상실로 인간 본성의 타락과 손상이 왔지만, 인간은 본래 불멸의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이것은 영혼만이 아니라 우리의 육체도 포함하는 전인(全人)을 의미합니다. 그 신비한 육체가 어떤 형태인지는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증거는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부활이 그 첫 열매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신자들에게 천국은 ‘아직’ 완전하지는 않지만 ‘이미’ 이루어진 완전한 천국을 오늘 여기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에서 말씀하신 대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신비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올바른 종말의식을 가진 신자에게 천국은 현재성이 있습니다. 현재의 삶에 영생이 담겨있습니다. 이 땅을 사는 동안에 우리의 모든 관심이 세상에서 잘되는 것에만 있다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에만 온통 집중되어 있다면 진정한 의미의 ‘하나님 나라’와는 관계가 없는 삶을 사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2. 미래지향적 영성

기독교인의 삶은 기본적으로 미래지향적입니다. 히브리서 11장1절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신앙의 본질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묵상하며, 세상을 버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현재를 넘어 천국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으로부터의 도피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생과 역사 가운데 임하는 하나님 나라는 세상과 무관하게 하늘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이란 현재와 격리된 삶도 아닙니다. 미래에 이루어지는 천국의 권세는 현재 가운데 침투하고 있습니다.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통해 내가 속한 이 자리에서 임하는 것입니다.
미래지향적인 영성은 이 세상을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의 구원의 과정의 최종 목적지가 영생임을 확실하게 하고 그 천국의 권세가 지금 나의 삶을 철저하게 주장하며 그 구원의 과정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말합니다.
(히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3. 복음의 능력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우리와 함께 하신 사건’입니다. 성육신의 영성은 이 세상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구원과 변화를 위하여 이 땅에 찾아오신 구원자의 영성입니다.
천국을 향한 강조는 세상으로부터의 도피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 속에서 세상의 삶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 것을 요청합니다. 천국에 속한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 함몰되지 말아야합니다. “천상의 삶을 누리도록 창조된 사람들이 전적으로 덧없는 것들을 좇으며 휩쓸리는 것은 … 참으로 비천하고도 부끄러운 일이다(칼빈).”
올바른 종말의식을 가진 신자에게 이 세상은 버려져야 할 땅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야 할 하나님의 무대입니다.
복음은 변화의 능력이 있습니다. (롬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세상에는 놀라운 변화가 왔습니다. 모든 인간의 저주가 무너지고, 죄의 세력이 섬멸되었으며, 구원이 완성되고 타락으로부터 회복되었습니다.
이제 세상의 운명은 더 이상 같을 수가 없습니다. 이제 세계는 그 방향을 하나님의 영광을 향하여 방향을 바꾸게 되었다.
올바른 종말의식은 단지 역사의 마지막 순간들에만 주목하지 않습니다. 역사의 한 가운데서 움직이고 있는 역동적이고 주도적인 변혁의 힘에 대해 주목합니다. 역사의 방향은 역사의 과정과 무관하게 존재하지 않습니다. 천국은 역사 속에 침투해 들어와서 역사에 의미를 주며, 역사의 종착역을 향해 역사를 끌어갑니다. 복음이 갖고 있는 변화의 능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