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의 위로

12월 22일 주일예배

성탄의 위로

누가복음 2:21-37

들어가는

성탄은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위로’가 되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시므온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고, 그 위로란 ‘하나님의 구원’이었습니다. 유대인 중 신실하게 믿는 자들은 이스라엘은 오직 메시야에게서만 위로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은 메시야의 오심을 모든 소망과 인내로써 고대하고 열망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처럼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막15:43).
우리는 성경에서 성탄과 관계된 많은 경건한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위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기다림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 세속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지옥 같은 삶을 살아가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진정한 위로’이며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만 찾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딛 2:11-14)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12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13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들이 그토록 기다렸던 ‘진정한 위로’는 무엇이었을까요?

 

1. 위로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린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혹자는 ‘천국은 있습니까?’하고 묻습니다. 저는 대답합니다. ‘당연하지요.’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되묻습니다.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천국의 증거가 주변에 널려 있습니다. 천국이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작용하는 영역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당신 인생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입니까? 거기에는 사람들의 숫자 만큼이나 많은 생각들이 존재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대부분 명예나 부귀나 쾌락으로 모아집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최고의 가치에 의해 당신은 지배를 받으며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렇다면 당신을 지배하는 그 최고 권력과 상관없는 가치는 무엇이 있을까요? 엄마가 아기를 품에 안고 느끼는 행복과 사랑, 돈의 힘과 관계가 있습니까? 어떤 사람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혈혈단신 오지에 사는 부족에게 찾아가서 함께 살면서 선교를 합니다. 거기에 명예가 있습니까? 돈을 벌까요? 쾌락이 있을까요? 세상의 권력에 맞서는 하나님 나라의 권력이 존재합니다. 천국의 증거가 아닌가요?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아빠의 가치
한 가족이 여행중에 큰 사고를 당했습니다. 아빠와 딸이 크게 다쳤고, 보조다리 없이는 걸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딸은 사춘기를 보내며 죽고 싶을 정도의 열등감에 시달렸습니다. 딸이 힘들어 할 때 아빠는 언제나 곁에서 딸을 지켜줍니다. 아빠는 나와 꼭 같은 아픔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나의 아픔을 낱낱이 알고 있었습니다. 아빠의 사랑으로 딸은 무사히 사춘기를 넘기고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대학 입학식 날, 그 모든 어려움을 건너온 딸이 너무 자랑스러웠습니다. 입학식을 끝내고 나올 때였습니다. 눈앞에 아주 긴박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차도로 한 어린 꼬마가 뛰어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내 눈 앞엔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아빠가 보조다리도 없이 아이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내 눈을 의심하며 아빠가 그 아이를 안고 인도로 나오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아빠?……” 나는 너무 놀라 소리쳤지만 아빠는 못 들은 척 보조다리를 양 팔에 끼고는 서둘러 가버렸습니다. “엄마? 엄마도 봤지? 아빠 걷는 거……” 하지만 엄마의 얼굴은 담담해 보였습니다. “놀라지 말고 엄마 말 잘 들어. 언젠가는 너도 알게 되리라 생각했어. 아빠는 사실 보조다리가 필요 없는 정상인이야. 그 때 아빠는 팔만 다치셨어. 그런데 4년 동안 보조다리를 짚고 다니신 거야. 같은 아픔을 가져야만 아픈 너를 위로할 수 있다고 말야.” “왜 그랬어? 왜 아빠까지…..” 딸은 자신도 모르게 울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세상의 가치들은 일시적인 것들이요, 이미 잃어버렸거나, 잘 가지고 있어봐야 죽을 때 뒤로 놓고 가야 하는 것들입니다. 어떤 사람들, 철학자들은 의미를 주장하기도 합니다. 국가를 위한 영웅적인 희생은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며, 철저한 금욕과 선행은 사람들의 모범으로 기록된다고 합니다. 백번 양보해서 그렇다고 하지요. 그것은 기억해주고 기려주는 사람들에게 그럴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신에게 대해서는 어떨까요?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한 부자와 거지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 부자가 남겨놓음이 어떠하든 그의 영생의 모습은 전혀 행복하지 않습니다.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눅16:25)”
그러면 또 질문합니다. ‘아니 현세적인 천국이 아니라, 죽음 후에 천국은 분명히 있습니까?’ 저는 대답합니다. ‘당연하지요. 저는 목사이니 성경을 기준으로 답하겠습니다. 성경은 죽음이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천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나 죽으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 분명히 계시고, 하나님 나라의 증거는 지금 우리 주변에 널려 있습니다.’
(로마서 8:38-39)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2. 참된 위로는 어떻게 얻습니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함께 장로교회 교리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는 그 첫번째 질문과 답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문1 : 살아서나 죽어서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답 :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는 나의 것이 아니요 삶도 영혼도 나의 신실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보혈로 나의 모든 죗값을 완전히 치르고 나를 마귀의 모든 권세에서 해방하셨습니다. 또한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나를 보호하시며 참으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나의 구원을 이루도록 하십니다 그러하므로 그의 성신으로 그분은 나에게 영생을 확신시켜 주시고 이제부터는 마음을 다하여 즐거이 그리고 신속히 그를 위해 살도록 하십니다.
문2: 이러한 위로 가운데 복된 인생으로 살고 죽기 위해서 당신은 무엇을 알아야 합니까?
답 : 다음의 세 부분을 알아야 합니다. 첫째, 나의 죄와 비참함이 얼마나 큰가, 둘째 , 나의 모든 죄와 비참함으로부터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셋째, 그러한 구원을 주신 하나님께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참된 위로는 분명 세속적인 내용들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참된 위로는 죽음 이후에도 변하지 않는 가치와 능력을 가진 것이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슬픔을 이기고 악을 견딜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참된 위로의 가치가 고통과 죄악과 비교했을 때 훨씬 더 크고 확실해야만 합니다.
참된 위로는 위조할 수 없습니다. 현대의 물리학과 철학들은 무수한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위조된 위로를 제공합니다. 위로는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어떤 철학적 묵상도, 종교적 자기추구도, 물리학적 추론으로 결코 만들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능력 밖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와야 합니다.
살아 있을 때에나 죽은 후에나 영원히 있는 유일하고 견고한 위로는, 바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값없이 죄를 씻음과 하나님과 화목됨에 대한 확신과 또한 영생에 대한 확실한 기대에 있으먀, 이러한 위로는 성령께서 복음을 통하여 마음에 심어 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고린도후서 1: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3. 살아서나 죽어서나 우리의 유일한 위로: 성령 하나님

성탄의 이야기가 기록된 성경을 자세히 보십시오. 중요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성령께서 주도하시고 모드 일들을 이끌어 가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성령으로 잉태되었으며(마1:18) 성령께서 남편 요셉의 판단으로부터 보호하십니다. 동방박사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했고, 헤롯왕의 손으로부터 구했습니다(마2).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으로 예수의 잉태를 감지했고(눅1:41), 목자들에게 알렸으며(눅2), 시므온은 성령의 감동으로 아기 예수를 만났고(눅2:27), 선지자 안나는 기도 중에 아기 예수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이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셔야 합니다. 부활하신다고 여러 번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믿지를 않았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제자들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고 슬프고 또 두렵겠습니니까? 주님은 제자들의 이 마음의 상태를 미리 내다 보고 계셨습니다. 내가 죽고 난 뒤에 주인 잃은 양처럼 흩어질 제자들을 생각하면 주님의 가슴이 답답하고 아프셨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잡혔을 때 제자들은 다 도망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장담까지 한 베드로도 주님을 세 번 씩이나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습니다. 주님은 이것들을 미리 다 아시고 계셨습니다. 특히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에 제자들은 문을 꼭 잠그고 유대인들이 혹시나 자기를 찾아서 죽이려고 하지 않을까 두려움으로 떨게 될 것을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
요한복음 20장 19절을 볼까요?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되었을 때(요13:1),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14:16-17).’
우리는 사도신경을 통해 신앙고백을 할 때 성령에 관하여 이렇게 고백합니다.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성부하나님께서 창조와 섭리를, 성자하나님께서 대속과 구원을 이루셨다면 성령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구원을 각 신자들에게 적용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어린 아이 같은 우리를 고아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오셔서 돕고 보호하십니다(롬8:26).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고 깨닫게 하십니다. 우리가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십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성령님의 위로를 힘입어 전진했고 교회는 부흥하였습니다(행9:31).
성령께서 거룩한 교회를 이루시고 성도들을 영적으로 하나되게 하십니다.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죄를 씻으시고, 부활하게 하시고, 영원히 살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으로 충만한 증인이 되게 하십니다. 병을 고치시고 죄의 권세로부터 자유롭게 하십니다. 가장 세밀한 영적 터치가 성령님을 통해 우리의 삶에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에 낙심하고 절망하고 두려하여 뿔뿔이 흩어질 제자들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위로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위로자 성령님을 제자들에게 보내신 것입니다. 성령님은 위로자입니다. 성령은 위로의 영이십니다. 성령님은 오늘 우리 곁에서 우리가 느끼고 있든, 느끼지 못하고 있든지 간에 우리를 항상 위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위로가 필요할 때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우리가 위로를 성령님께 요청하면 우리를 위로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