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이 필요한가

12월 15일 주일예배

성탄이 필요한가

누가복음 2:1-14

들어가는

찰스 디킨슨의 중편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구두쇠 스크루우지 영감’이라는 별명으로 더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는 스크루우지의 꿈에 동업자였던 말레가 나타나 ‘베풀며 살지 못했던 자신의 삶’을 후회하는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그의 꿈에 세명의 유령이 나타납니다. 첫째는 고독하고 외로웠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보여줍니다. 둘째는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사는 주변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셋째는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면서 쓸쓸하게 끝나는 자신의 장례식을 보여줍니다. 각각의 장면들은 스크루우지에게 지독한 후회와 교훈을 남깁니다.
꿈에 보았던 그의 미래모습이 인상적입니다. 그가 죽자 청소부, 세탁부, 장의사의 여자들이 스크루지 집에서 돈이 될만한 것들을 훔쳐서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가 죽자 그의 가까운 사람들에게 찾아온 것은 슬픔과 애도가 아니었습니다. 놀랍게도 기쁨과 자유를 느낍니다. 그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그의 장례식에 이름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자신의 묘비를 앞에 두고 울부짖습니다.
그 꿈의 세번째 경험은 미래예측입니다. 미래예측은 예측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신의 미래 예측을 놓고 바꾸겠다는 결심과 실천력만 있다면 우리는 미래를 바꿀 수 있습니다. 다행히 스크루지는 그의 미래 예측을 동기로 현재를 바꾸면서 그의 미래를 바꿀 수 있었습니다.
운명론자가 미래예측을 한다면 절망합니다. 점쟁이가 미래예측을 한다면 부정한 액을 막겠다고 부적을 쓸 겁니다. 과학기술의 미래예측은 곳곳에 핵무기와 정보의 함정들을 만들어 놓고 평화를 이루었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이 미래예측을 한다면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최고의 성품 ‘자유의지’를 가지고 결단과 실천, 정의와 사랑의 균형을 이루면서 미래의 왜곡성을 변화시키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갈 것입니다. 그것이 기독교가 희망이 되는 이유입니다.
성탄의 소식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성경은 성탄이 우리에게 진정한 희망이 되는 이유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세 가지 방향성입니다. 타자지향성, 구원지향성, 그리고 본질지향성입니다.

 

1. 성탄은 타자를 지향합니다.

원로 지성인 중에 연세대학교 철학과 교수이셨던 김형석 교수께서 2018년에 ‘왜 우리에게 기독교가 필요한가’라는책을 저술했습니다. 서론에서 김형석 교수는 “교회는 사회가 요구하는 진리를 찾아주는 교회가 되어야 하고, 민족과 국가를 하나님의 나라로 바꾸는 책임과 사명” 때문에 ‘기독교는 우리 삶에 절실히 필요하다’고 역설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교회는 철저하게 영적입니다. 예수님은 한 번도 ‘건물이 좋은 교회,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큰 교회’를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18:20에서 교회에 대한 가르침을 주시던 자리에서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가 교회되도록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스도를 기초로, 그리스도를 머리로 공동체가 이루어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작게는 예수를 믿는 가정이 기독교 공동체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몇 명이 모여 예배하는 곳, 작은 기도모임, 심지어는 북 클럽이라 하더라도 그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이 기독교 공동체이며 교회의 의미를 갖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는 반드시 타자지향성을 갖습니다. 에밀 브루너의 말대로 ‘촛불이 탐으로 존재하듯 교회는 선교로 존재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진 교회는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신 대로 교회의 존재 이유는 분명합니다. 오늘 성경이 증거합니다. 성탄의 ‘위대하고 기쁘고 선한 소식’은 온 백성에게 미치는 소식입니다.
‘복음이 울다’라는 책에 보면 한 목사의 경험이 소개됩니다. 데이비드 플랫 목사는 ‘래디컬’이라는 베스트셀러의 저자이고, 유명한 복음주의 목회자입니다. 어느 기회에 그는 히말라야 트레킹을 하게 됩니다. 그는 날마다 숙소 바닥에 엎드려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을 쏟았습니다. 세계를 무대로 예수의 복음을 힘 있게 외쳤던 목사가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고통의 민낯 앞에서 느낀 무기력과 내적 갈등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정말로 예수님이 세상의 소망이신가? 절박한 상황에 처한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살라는 부르심은 무엇인가?’하는 겁니다. 영적, 육적으로 신음하는 세상을 위해 지금 그리스도인들의 일상에 뭔가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가 눈감아 온 세상, 우리가 모른 체한 사람들 때문에 복음이 울고 있다고 말합니다. 복음을 듣고도 삶이 변하지 않는 우리 때문에 이 땅의 복음, 예수께서 울고 계시다고 그는 눈물을 멈추지 못합니다.

2. 성탄은 구원을 지향합니다.

성탄은 기쁜 소식입니다. 기쁨은 자유로부터 옵니다. 자유는 모든 속박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오늘 성경 누가복음 2장 뒷부분에는 성탄에 관련한 두 사람의 선지자 기록이 있습니다. 시므온은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구세주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하나님의 자유’를 찬송합니다. 구원을 보았으므로 자유롭습니다. 안나는 팔십사세가 된 기도의 여인이었습니다.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감사하면서 ‘예루살렘의 속량’이 이루어짐을 찬송합니다.
구원이란 새로운 세상에 대한 경험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을 지으셨을 때 아담과 하와는 자유의지로부터 자유롭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자유의지는 하나님의 허용아래 죄를 선택할 가능성은 언제나 있었고, 그들은 그들의 의지로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태어났을 때, 성령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새롭게 하십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지식에 까지 새롭게 하시고, 아직 죄악속에 부패한 모습이지만 하나님께로 방향을 돌이켜 믿음으로 살고자 할 때 하나님은 그것을 ‘의로 여겨’ 주십니다. 이제는 우리가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 죄의 책임을 하나님께서 감당하시는 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우리에게 영생의 길을 열어 놓으신 성탄의 의미입니다.

3. 성탄은 본질 회귀를 요구합니다.
성탄은 ‘선한 소식’입니다. 선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적합하다는 뜻입니다.
기독교는 ‘인류에게 희망이 있는 것인가’하는 질문에 답을 주어야합니다. 최근에 인류와 인공지능의 공존 문제가 세계적인 화두가 되고 있습니다. 핵무기가 개발되고, 지구촌에는 각종 국지전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인류가 과연 인류를 구원할 수 있을까요? 그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세계의 정치 책임자들에게 ‘핵무기를 이렇게 많이 개발해놓고 평화를 원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우리는 인류 파멸의 길을 열어 놓았다’고 경고했습니다.
조이 이토의 ‘나인’이라는 책은 우리 시대를 정의하는 세 가지 키워드로 ‘비대칭성, 복잡성, 불확실성’을 제출합니다. “소규모 해커 집단이 정부에 대적할 수 있게 되고(비대칭성), 수많은 개별 부분이 아찔한 연쇄 반응을 낳으며(복잡성), 다음에 뭐가 올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불확실성) 시대에 미래를 예측하는 일은 무의미하다. 우리는 현재에 적응해야 한다.” 지금은 국가의 힘이 소규모 해커 집단을 막지 못할 수 도 있습니다. 누구도 책임지지 못할 정보와 기술을 들고 우리는 어린 아이처럼 벌벌 떨고 서있습니다.
성경과 교회는 위기의 미래에 답을 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구별하라고 하십니다. 세상의 가치관과 하나님의 가치관은 대립하고 충돌합니다. 지금은 그것들이 함께 뒤섞여 있습니다. 구분이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 같고 세상이 교회 같습니다.
가치관을 분별할 때는 묻는 질문이 있습니다.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살 것인가?’ 인생의 목표가 돈 버는 것, 출세하는 것, 권력을 가지는 것이면 세속적인 것입니다. 그 목표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 인생이 그러한가 묻는 것과 같이 우리는 ‘교회가 그러한가’를 물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