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구의 신앙

12월 8일 주일예배

허구의 신앙

로마서 1:16-32

들어가는

유발 하라리는 이스라엘 출신의 역사학자이며 무신론자입니다. 그의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인 ‘사피엔스’에서 인류역사는 허구위에 세워졌다고 합니다. 그는 인류의 역사를 구성하는 핵심요소 5개가 있는데, 언어, 신화, 돈, 제국, 과학이며 그 공통된 본질은 허구라는 것입니다. 허구는 이야기이며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인간은 허구에 살고 허구에 죽으면서 역사는 구성되어 왔다고 합니다. ‘허구에 영향을 받지 않고 기술의 힘으로 신이 되려는 인간, 호모 데우스’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호모 사피엔스’는 멸종을 맞이할 것이라고 그는 예견합니다.
인간사회의 대부분의 요소들이 초고도의 기술로 치환되면서 비인간화가 가속되고 있습니다. 인류 자명한 원칙이요 도덕적 가치라고 규정했던 것들이 허구라고 평가되면서 서서히 그 빛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더구나 기독교인들이 갖고 있는 신앙적 가치는 이미 오래전부터 도전을 받은 것이 사실입니다.
오늘은 기독교신앙을 포함하는 모든 종교적 가치들 뿐만 아니라 인류사회의 자명한 원칙들까지도 이 허구라고 주장하는 사회에서 믿음의 좌표는 무엇인지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 허구에 대한 열정

이런 우화가 있습니다. 미친 사람이 대낮에 등불을 켜고 시장으로 달려나가 신을 찾는다고 소리칩니다. 그곳에는 신을 믿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비웃습니다. 신이 아이처럼 길을 잃었나? 신이 숨어버렸나? 배를 타고 떠났나, 이민을 갔나?
광인은 심장을 꿰뚫는 듯한 눈길로 소리칩니다. ‘내가 답을 주겠다. 우리가 신을 죽였다. 너희와 나는 살인자다! 그렇지만 우리는 어떻게 이런 일을 저질렀나. 우리는 무슨 짓을 하였나. 지구를 태양으로부터 풀어놓았을 때, 지구는 어디로 추락하는 것인가. 우리는 방향도 없이 무한한 허무를 통과하여 헤메이고 있나. 허공이 우리에게 한숨을 내쉰다…(니체, 즐거운 학문 ch.125)
이 이야기에는 인간들이 추구하는 허무의 단편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정신적인 무한한 수평선이 펼쳐져 있습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믿고 의지했던 하나님의 가치를 부정하고 돌아올 길 없는 대양을 향해 출항했습니다. 무한한 자유가 자비로운 꿈처럼 펼쳐져 있지만, 무한한 대양 속에서 무한보다 더 두려운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하나님과 도덕적 가치를 죽여버리고 만나는 허무의 대양에서 몸서리치는 밤을 맞이하는 겁니다.
허구를 주장하는 것도 신앙입니다. (이사야 30:12) 이러므로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이 말을 업신여기고 압박과 허망을 믿어 그것을 의지하니
허무주의는 무기력이 아닙니다. 회의주의는 헛됨을 발견하고 좌절하지만, 허무주의는 무를 향한 강한 열정입니다. 허무주의는 반신론의 극치입니다. 신을 부정하기위해 무에 집중합니다. 인간 중심 체계를 세우기 위해 신중심 체계를 박살냅니다. 그렇지만 아쉽게도 육지를 부정하고 출항한 배는 신대륙을 발견하지 못하고 허무의 대양과 마주합니다(니체, 즐거운 학문 ch 124).
유발 하라리는 이제 그 육지를 발견한 듯 합니다. 그것은 영혼이 완전히 빠져버린 순물질, 기계와 정보의 혼합체 ‘호모 데우스’입니다. 그에게는 신은 고사하고 인류가 이룩한 모든 자명한 원칙, 도덕, 예술, 문화조차도 모두 허구가 됩니다. 인간의 영적이고 정신적인 가치가 모두 무너지고 초고도 기술로 물리적인 영생을 이루면 인간은 신이 된다고 믿습니다.
그들이 갖고 있는 ‘허무의 신앙’입니다.
(아모스 6:13) 허무한 것을 기뻐하며 이르기를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뿔들을 취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는도다
(욥기 15:31) 그가 스스로 속아 허무한 것을 믿지 아니할 것은 허무한 것이 그의 보응이 될 것임이라
(예레미야 18:15) 무릇 내 백성은 나를 잊고 허무한 것에게 분향하거니와 이러한 것들은 그들로 그들의 길 곧 그 옛길에서 넘어지게 하며 곁길 곧 닦지 아니한 길로 행하게 하여
(에베소서 4:17)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2. 영성만 남은 껍데기 종교

위의 우화에서 신의 죽음을 선포하는 광인은 ‘이제 가능해진 새로운 자유’를 기뻐하기 보다 신의 죽음을 애도합니다. 이야기는 이렇게 끝납니다. ‘그날 광인은 여러 교회에 뛰어들어 신의 장송곡을 불렀습니다. 밖으로 끌려나와 심문을 받자 그는 이런 대답을 되풀이 했다고 합니다. 이 교회가 신의 무덤과 묘비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신의 죽음을 선포한 광인이 두려움에 찬 이유는 무엇일까요. 무능력입니다. 여기는 두 가지 무능력이 있습니다. 첫째는 신의 죽음을 선포한 광인의 무능력, 새로운 가치 체계를 찾지 못하고 그는 신을 애도하며 신없는 미래를 불안해합니다. 둘째는 군중들의 실제적인 방임입니다. 시장 사람들은 살아있는 신의 실재성도 그렇다고 신이 죽었다고 한들 새로운 현질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합니다. 그 어느 것도 그들이 먹고 살아가는 일에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무는 신을 죽이고 나서 세운 또 하나의 신입니다. 그들은 무를 갈망하고 열정적으로 추구합니다. 기독교의 확신자들을 조롱하면서 그들은 무라는 신을 추종하는 또 다른 확신자들이 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무는 어느 것으로도 대치될 수 있습니다. ‘피안, 신, 참된 삶, 열반, 도, 덕성, 구원, 지복… 현대에 와서는 심지어 기계와 정보, 인공지능’ 등의 이름으로 무를 설득하고자 합니다. 현대 지성인들이 앓고 있는 위험한 질병입니다.
허무주의자들이 아무리 인간의 영적, 정신적, 형이상학적 존재성을 부정하고 무너뜨리려 해도 그것은 부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출발부터 모순을 안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미 정신적인 활동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나는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내가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그 모순성을 스스로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기독교 신비주의입니다. 성경의 하나님 없이 영적 현상들을 설명하고 체험해보려는 것입니다. 이전의 영성은 하나님을 추구해가는 영적 생활의 형태였고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영성을 이야기하면 주로 신이 제거된 종교활동을 주로 영성이라고 표현합니다. ‘영적이지만 성경적이 아닌’ 신비체험을 찾으려고 합니다.
오늘의 성경 말씀대로라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고”,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남은 기독교는 ‘영성만 남은 껍데기 종교’입니다. 거기에 ‘상천하지의 하나님’이 계실리가 없습니다.

3.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갈릴리 바다 어두운 밤 제자들이 풍랑으로 인해 어렵게 노를 젓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어서 오시는데 베드로가 물위를 걸어 주님께로 가는 경험을 합니다. 그렇지만 이내 바람을 보고 빠져 갑니다. 그를 건져내신 주님은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고 말씀하십니다(마14).
우리의 신앙이 초점을 잃고 방황하면 환경에 묻혀 파멸하게 됩니다.
오늘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화란의 목회자요 정치가였던 아브라함 카이퍼, 1989년 프린스턴 대학으로부터 명예 법학사 학위를 수여받으면서 칼뱅주의 강연을 행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총 6가지 주제의 강연을 하게 되는데 유명한 <칼뱅주의 강연>입니다. 여기서 그는 6차례에 걸쳐 “삶의 체계로서의 칼빈주의, 칼빈주의와 종교 ,정치, 학문, 예술, 그리고 칼빈주의와 미래”에 대해 강연합니다.
카이퍼는 칼뱅주의 강연을 통해 무엇보다 칼뱅주의는 교파나, 신학 체계를 넘어서서 하나의 세계관임을 강력하게 호소합니다. 그는 칼뱅주의를 하나의 신학, 교파, 교리 등으로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카이퍼 자신에게 있어서 칼뱅주의는 성경의 진리에 대한 삶의 체계(방식), 그 자체였습니다.
이 강연에서 아브라함 카이퍼는 보다 적극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동안 이론에서만 머물렀던 신학과 신앙 그리고 기독교 사상을 인생 전반에 걸쳐 반영시키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즉 절대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절대적 규범으로 삼고, 기독교 역사의식 즉 섭리사적 사관에 의한 역사의식을 통해 자신의 삶의 영역에 하나님의 영광을 보다 적극적이고 풍성하게 드러내는 삶을 살아가자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