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일 주일예배
하나님의 선물
마태복음 1:18-25
들어가는 말
우리는 삶의 여러 환경 속에서 선물을 주고 받습니다. 선물을 받으면 기쁩니다. 선물은 값없이 주고 받는 것입니다. 보답을 기대하고 주는 선물은 받기가 부담스럽습니다. 선물은 보답해야 한다는 부담이 없을 때 기쁨과 자유가 있습니다.
선물 중에 가장 값진 선물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선물은 선물의 제공자가 하나님이기 때문에 선물을 받는 사람에 의해 의미가 타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선물은 종종 그 의미가 타락할 때에는 뇌물이 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은 가장 완벽한 선물이 됩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우리의 생명으로부터 가정, 자연환경, 인생 자체가 모두 값없이 받아 누리는 선물들입니다. 오늘은 세 가지 면만 생각해봅니다. 첫째, 생명의 선물, 둘째, 거듭남의 선물, 그리고 셋째는 예수 그리스도가 선물입니다.
1. 생명의 선물
칼럼니스트 마사 베크가 쓴 책 중에 “아담을 기다리며”라는 책이 있습니다. 아담은 그 부부의 다운증후군을 갖고 태어난 아들입니다. 마샤와 남편 존은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학위 과정에 있었고 모두 시간에 여유가 없었으므로 임신이 반갑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산부인과 검사결과 태중의 아기는 다운증후군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고민하던 부부는 아기를 낳기로 결심합니다. 장애아 아담을 출산하면서 부부는 지금까지 가지고 살아 왔던 가치관들과 하나 둘 씩 이별을 합니다. 남편 존은 말합니다. “내가 받은 그 모든 교육과 훈련에도 불구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에 대해 내가 아는 거의 모든 것은 학교에서가 아니라 단 한 사람, 내 아들 아담에게서 배웠다.” 이 부부는 장애를 가진 자녀의 탄생과 함께 거듭났던 것 같습니다.
한국에 요즘 ‘코시안’이라는 신조어가 생겼습니다. ‘한국인 코리안’과 ‘아시안’과 합쳐 생겼습니다. 최근 한국의 다문화가정을 대변하는 말입니다. ‘아이를 잘 만드는 여자’라는 책에 소개된 단면이 있습니다.
“나이 들어 사내가 맞이한 아내/ 아내는 스물 한 살, 친정은 머나먼 베트남/ 혼인한 지 일 년이 안 된 부부는/ 아침엔 눈짓으로 식사할 때를 알리고/ 낮엔 손짓으로 밭에 나갈 채비를 하게 하고/ 저녁엔 몸짓으로 쉴 자리를 가리켰다/ 머지않아 아이가 태어날 것이다/ 아내가 부른 배를 부둥켜 안고 있으면/ 남편이 쳐다보고 웃었다/… 나이 들어 아내를 맞이한 사내/ 사내는 마흔 두 살, 처가는 머나먼 베트남/…”
잠깐만 생각을 해도 이 여인의 애환은 선명한 그림처럼 눈 앞에 떠오를 것입니다. 소위 입덧이라는 것을 할 때 먹고 싶은 음식의 그림자도 없는 곳, 임신이라는 여자 인생 최강의 도전에 온 몸의 뼈까지 뒤틀릴 때, 옆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은 위기감, 소위 말하는 ‘결혼이주’ 여성들입니다. 그들의 경험에 특별한 점이 있습니다. 아이를 낳았을 때 경험하는 모성애입니다.
자녀출산에서 처음 느끼는 기쁨, 감사, 신비로움 등은 모성을 자각하면서 발견하는 원초적인 쾌정서입니다. 그 기쁨은 가히 모든 불안과 고통을 상쇄시키고도 남을 만큼 강력한 것입니다. 생명자체에 대한 경외감… 아기가 그냥 이쁘다고 합니다. 하루 종일 아기와 같이 있어도 너무 재미있고 좋습니다.
여성들은 출산을 경험하면서 생명을 경험하고 생명의 태동과 함께 생명과 융합해가면서 남성들보다 한발짝 생명에 가깝게 접근하는 것 같습니다.
남자는 불혹의 나이 40이 되면 생명의 존재에 대한 접근을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인도에서는 옛날에는 남자나이 40이 되면 출가를 한다고 합니다. 걸식 수련을 하면서 존재의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을 시작한다는 것이지요.
존 스토트는 ‘기독교의 기본 진리’에서 “생명은 하나의 수수께끼이다. 육체적 생명이든, 영적 생명이든, 그 본질은 기원처럼 불가사의하다. 우리는 생명을 정의할 수도, 어디서 왔는지 말할 수도 없다. 단지 생명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할 수 있을 뿐이다. 예수님께서 주시겠다는 것도 바로 이 선물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생명에 관하여 성경이 교훈하는 바는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며 값없이 주신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생명을 갖고 공급을 받으며 살아가도록 주신 만물 또한 값없이 주신 것이므로 하나님의 선물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고전4:7).
생명현상처럼 신비한 것이 없습니다. 인간은 생명을 경험할 뿐이지 생명을 창조할 수 없습니다. 생명은 영적인 것입니다. 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인공지능이 인간한계를 뛰어 넘어 발전을 해도, 심지어 인간의 생명을 물리적으로 연장하여 영원히 산다고 해도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영생의 의미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창 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요한1서 5:11)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에베소서 4:18)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고린도전서 4:7)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2. 거듭남의 선물
생명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이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리스도를 통해 주시는 영생이 또 다른 선물입니다. 필요한 성경구절이니 함께 인용하면서 살펴봅시다.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로마서 5: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로마서 5: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위의 성경구절에서 발견하는 바가 있습니다. 신자와 불신자가 함께 경험하는 생명이 있고, 신자 만이 경험하는 독특한 생명, 영생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7:3에서 주님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생명현상은 모든 생명체가 경험하는 것이지만 영생은 오직 신자들만이 경험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도 주님은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구분에 대해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어느 날 밤중에 니고데모라는 유대의 지도자가 예수님께 왔습니다. 하나님의 기적과 신비에 대해 궁금해하던 그에게 주님은 거듭남에 대해 가르칩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말씀하신 주님은 ‘땅의 일이 있고 하늘의 일이 있다’고 하십니다. 그 ‘하늘의 일’이란 ‘십자가로 속량의 길을 열어놓으시고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시는 일’이라고 연이어 설명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성경구절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3:16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거듭남은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마태복음 7:7-8은 말씀합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요한계시록 3:20에도 비슷한 말씀을 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의지와 결단을 가지고 주님께로 삶의 방향을 돌이키는 사람에게 주님은 반드시 오셔서 함께 하십니다. 그의 신비와 기적을 경험하며 생명으로 가득할 뿐만 아니라 영생의 기쁨을 알게 될 것입니다.
존 스토트의 일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런던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한 한 젊은이가 찾아왔습니다. 그는 믿지 않는 사도신경을 외우는 것이 위선자가 되는 것 같아 교회를 그만 나가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목사님은 ‘내가 만약 당신의 질문에 대해 지적으로 만족할 만한 대답을 한다면 기꺼이 당신의 생활 태도를 바꾸시겠습니까?’하자 그는 슬쩍 웃으면서 얼굴을 붉혔습니다. 진정한 문제는 지적인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것에 있었던 것이지요.
(에베소서2:8-9)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에베소서3:7)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
(요한복음 4:1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사도행전 11:17)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사도행전 2: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3. 예수님이 선물입니다.
데미안은 나병환자촌에서 사역하던 선교사였습니다. 그가 건강한 모습으로 설교를 했을 때 회중들은 잘 반응하지 못했습니다. 공감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결단을 하고 스스로 몸에 상처를 내고 피고름이 흐르는 환자의 환부에 대어 감염되도록 했습니다. 그는 결국 나병환자가 되었고 그때서야 그의 설교는 환자들에게 생명의 복음이 되어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신비로운 분입니다. 누구도 하나님을 이해할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천국의 언어로 말씀하시면 사람들은 누구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방법과 사람의 말로 전달하고 드러내지 않으시면 누구도 하나님을 이해할 가능성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시고 계시하신 하나님 자신’입니다.
(요한복음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골로새서 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골로새서 2:2-3)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
오늘 예수님의 탄생 기록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20절)”,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21절)”,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22절)”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신비가 있음을 우리는 먼저 믿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찾아오신 일이므로 사람의 지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하늘의 일’입니다.
그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구원과 계시입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탄생하신 이유는 첫째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기’위함이며, 둘째는 ‘하나님의 우리와 함께 계심’, 즉 하나님의 자기 계시입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주도적인 행동에 주목해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창1:1), 계시하시고(히1:1-2), 구원하십니다(눅1:68). 그 모든 일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예수 없이 하나님을 이해하는 일은 없습니다. 예수 없이 하나님께 가는 길은 없습니다.
성탄의 중심 메시지는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하나님입니다. 이 질문을 우리는 그냥 지나 칠수 없습니다. 정직한 응답을 찾아야합니다. 만일 예수님이 육체로 오신 하나님이 아니라면 기독교는 박살이 납니다(존 스토트). 그렇게 되면 기독교는 단지 몇 가지 아름다운 사상과 고상한 윤리를 지닌 하나의 평범한 종교가 되어 그 독특성이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