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의 영성

11월 24일 주일예배

감사의 영성

데살로니가전서 5:16-18

들어가는

산업혁명이 시작되고 있을 때 기계와 대결을 펼쳤던 존 헨리의 전설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존 헨리는 터널을 뚫는 일을 하는 철도 노동자였습니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사업주가 기계를 도입하려고 하자 노동자측에서 반발이 터져나왔습니다. 기계보다는 섬세한 인간이 더 터널을 잘 팔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때 등장한 사람이 바로 존 헨리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기계와 대결을 해보겠다고 선언하고, 산 하나를 두고 동시에 기계와 터널을 파기 시작했습니다. 반대편에선 사람들이 모여서 누가 먼저 뚫고 나오느냐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구멍이 뚫리고 존 헨리가 먼저 나오자 사람들은 엄청난 환호를 지르며 그를 반겼습니다. 그런데 그는 경쟁에서 마지막 숨을 다하고 그 자리에서 숨졌습니다.
그 이후도 컴퓨터, 인터넷, 빅데이터, 인공지능 등이 개발되고 발전하여 역사의 변곡점을 만날 때마다 ‘인간이 기계보다 우월한가’을 가늠하는 도전들은 늘 있어 왔습니다.
1997년 체스왕 카스파로프와의 대결, 2011년 퀴즈왕들과의 대결, 2017년 바둑왕 이세돌 기사와의 대결, 모두 인간의 패배로 결론이 났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이 모든 시도들이, 존 헨리의 터널뚫기 경쟁처럼 ‘무모한 대결’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라는 이솝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야기는 달리기가 느린 거북이가 달리기 선수인 토끼에게 달리기 시합을 제안하면서 시작됩니다. 흔쾌히 거북이의 제안을 받아들인 토끼는 한참을 달리다가 거북이가 안 보이자 중간에 쉬다 잠이 들고 그 사이에 거북이는 부지런히 달려가 결국 느린 거북이가 빠른 토끼에게 이긴다는 줄거리다.
이에 대한 해석이 각 문화마다 다른데, 한국에서는 ‘재능이 부족하더라도 꾸준히 노력하는 거북이의 근면성’에 무게를 둡니다. 미국에서는 ‘잠든 토끼를 깨우지 않고 경쟁없이 승리를 얻은 거북이가 비겁하다’고 공정성에 초점을 둡니다. 아프리카에서는 ‘거북이가 친구 거북이들을 이용해서 토끼를 지치게 만들어 승리를 했다’고 내용을 바꾸어 종족의 연대를 강조하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스위스에서는 가르침의 포인트를 ‘합리성’에 둔다고 합니다. 애초에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라는 설정이 불합리하고 불공정하다는 것입니다.
시대는 변화의 급물살을 타고 있습니다. 인공지능과 로봇이 주도하는 제4차 산업혁명, 인간과 기계의 경계가 불분명해진다는 포스트휴먼 시대를 맞으면서 ‘인간이 기계보다 우월한가’에 대한 ‘무모한 도전’은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늘 그러했듯 ‘지금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질문이겠지요. 우리는 ‘누가 우월한가’하는 경쟁보다 ‘우리는 무엇이 다르며 어떻게 살 것인가’에 더 많은 논의를 해야할 것입니다.
우리는 물질과 경쟁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본질과 삶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뜻’에 대해 말씀하면서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한다고 제시하고 있습니다. 기쁨과 기도와 감사입니다. 이 모든 단어들은 ‘영적’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이 물질적 차원만 있다면 인간은 끊임없이 기계와 문명의 발전 앞에 늘 ‘무모한 도전’을 해야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늘 분명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우리의 삶이 영적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물질과 경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인간 문명이 아무리 발전하고 인공지능이 아무리 명석해도 그것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사용할 뿐입니다. 그 모든 것을 합하여도 한 영혼의 가치와 비교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성경의 가치입니다.
우리의 몸은 물질로 이루어졌으나 성령의 전입니다. 우리의 삶이 영적이라는 뜻입니다. 그 영성이 다른 피조물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입니다. 오늘 성경에는 영적인 단어 세 가지가 있습니다. 기쁨, 기도, 그리고 감사입니다.

 

1. ‘항상 기뻐함’은 영적인 것입니다

우리의 기쁨이 물질적이고 육정적인 것 뿐이라면 그것은 육적 쾌락입니다. 우리의 삶을 충만하게하고 의미있게 만드는 영적인 것이 아닙니다. 사도 요한의 기록을 주목해야합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은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며, 이 세상과 그 정욕은 지나가는 것이라고 합니다(요일2:16-17). 풀이 마르고 꽃잎이 떨어지는 것처럼 말라버리며, 안개처럼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그 끝에는 허무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허공으로 흩어지는 연기 같습니다.
성경이 증거하는 ‘진정한 기쁨’은 그렇지 않습니다. 제자들의 기쁨은 성령 충만과 함께 왔습니다(행13:52).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기쁨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기쁨’이며 ‘우리 안에 충만하는 것’입니다(요15:11). 박해와 수욕 중에라도 기뻐할 수 있는 기쁨입니다.
오늘 성경은 증거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언제나 기뻐할 수 있다면 그 기쁨은 영적인 것입니다. 금새 사라져 버리고 더 깊은 허무를 가져오는 육적인 쾌락이 아니라,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기쁨이라면 영적이고 영원한 것이며, 하나님의 것입니다.

요한일서 2:15-17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2. ‘쉬지 않는 기도’는 삶의 방식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으로 기억나는 일이 있습니다. 사무엘상 12:23에 보면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이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기도하기를 쉬는 것’을 죄라고 표현합니다.
‘쉬지말고 기도한다’는 말은 일년 365일 하루 24시간을 기도하고 있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기도는 ‘하나님 앞에 존재하는 우리의 삶의 방식’입니다.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15:4-8에 보면, ‘우리가 주님 안에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면 이루리라’ 말씀하십니다. 삶의 방식으로서의 기도입니다.
에베소서 6:18에는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도는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기도가 어떠해야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모든 기도는 ‘항상 성령 안에서, 깨어,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라는 수식어가 붙고 있습니다.
‘쉬지 않는 기도’는 ‘항상 성령안에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도가 하나님의 영의 능력 안에서 그 힘을 발휘하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카리스 주석). 성도들의 기도는 성령과 밀접한 연관을 지니고 있습니다(롬8:15).성령의 충만을 받은 사람들이 성령 안에서 지속적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13에는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라는 말은 ‘prepare your mind for action’이라는 뜻입니다. 액션을 위해 준비하고 있는 마음이 곧 ‘항상 성령안에’ 있는 모습입니다.
어느 곳에 가니까 기도에 값이 매겨져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기도를 대신해주는 값입니다. 새벽에 매일 기도해주는 데 얼마, 금식하면서 기도해주는 데 얼마, 기도요청하는 사람이 바쁘고 기도에 쓸 시간과 정성을 만들기 어려우니 대신 기도해주는 사람에게 값을 지불하고 기도를 대신 해달라고 했습니다. 기도가 기도하는 양에 따라 결정된다면 그렇게 해도 되겠지요. 그러나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기도는 그것이 아닙니다.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가장 중요하고 기도하는 기도자의 삶이 더 중요합니다. 삶으로서의 기도, 항상 성령안에서 깨어 있는 사람의 기도입니다.
‘기도하기를 쉬는 것’은 죄입니다. 기도는 호흡 같습니다. 호흡으로 혈액에 산소를 공급하고 온 몸 구석구석에 전달하듯 우리는 하나님의 영으로 숨쉬고 그 힘으로 살아갑니다. 주님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라 우리가 그 안에 붙어있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 안에 있어야만 열매를 맺을 수 있듯, 주님으로 숨쉬고 주님으로 심장이 박동합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3:16)”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23)”

3. ‘범사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라는 의미입니다. 모든 일에 감사가 담겨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인식하고 감사하는 것이 우리를 향해 갖고 계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감사는 우리의 범사에 하나님의 복을 발견하는 방법입니다. 이 말씀은 형통하고 좋은 일들이 많이 생겨서 감사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기복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범사는 모든 일입니다. 기쁜 일, 슬픈 일 모두를 포함합니다. 기쁜 일에서 감사하듯 슬픈 일에서도 감사를 찾습니다. 슬픈 일에서 눈물을 흘릴 때 감사를 찾는다는 것은 보물찾기입니다. 진흙속에 숨겨둔 보석을 찾는 일입니다. 힘든 일에서 감사하는 것이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것은 실로 감사의 신비입니다.
에베소서 5:20절도 강조합니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감사는 하나님을 힘입어야 가능합니다. 골로새서 3:17에는 “‘또 무엇을 히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범사, 즉 모든 환경에, 무엇을 하든지, 즉 우리의 모든 행동에 ‘주 예수의 이름으로’ 시행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감사할 수 있는 힘은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오직 ‘하나님을 힘입어’
감사는 구원을 이루는 신앙의 고백이 되기도 합니다. 누가복음 17장에는 주님께서 고치신 열명의 나병환자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중에 감사하기 위해 돌아온 사마리아 사람에게 주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감사를 조건으로 병을 고친 것이 아닙니다. 감사는 구원에 이르는 믿음의 고백이 되었습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136:1)” 이 말씀은 두 가지 뜻이 공존합니다. 감사하면 하나님의 선과 인자하심을 알게 됩니다. 역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었으므로 감사하기도 합니다.
힘든 일이 있으면 굳이 미화하려고 하지는 마십시오. 슬픈 일이 있으면 슬퍼하고 눈물이 나면 눈물을 흘리십시오. 그렇지만 감사하십시오. 하나님의 신비를 경험하게 될 겁니다. 우리가 힘들어하는 자리에도 언제나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은 동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28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