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자비

7월 7일 주일예배

그리스도인의 자비

들어가는

우리는 지금 갈라디아서 5:22에서 말씀하고 있는 ‘성령의 열매’ 아홉 가지 중에서 매달 하나의 주제를 상고해보고 있습니다. 이 달에는 ‘자비’에 대해 생각을 해보려고 하는데, ‘성령의 열매’에 대한 서론을 한 번 더 복습해보면 좋겠습니다.

‘성령의 열매’가 보여주고 있는 그림 한 장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닮은 성도’의 모습입니다. 그 인격과 삶에서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나고 그리스도의 삶의 향기가 배어 나오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가능하지 않으며(요15:4), 예수 밖에서 수행된다면 도덕적 가치는 있겠지만 영적으로는 공허하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성령으로 심어야 맺을 수 있습니다(갈6:8). 성경은 이를 농부의 수고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성숙의 과정으로서 점진적이기 때문에 인내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야고보서 5:7)”

(갈 6:7-9)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오늘 말씀의 주제가 되는 ‘자비’는 본래의 뜻은 ‘친절 Kindness’입니다. 우리말 성경에서 ‘자비’라는 말은 여러 단어들을 혼용해서 번역하고 있으므로 강해를 할 때에는 맥락과 원어의 뜻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은 1) 자비(친절)이라는 단어의 의미, 2)하나님의 성품으로서의 자비, 그리고 3)그리스도인의 인격과 성품이 되어야 하는 성령의 열매로서 자비에 대해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1. 인내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

도덕적인 의미에서 사용하는 ‘자비’라는 말이 있지만 이는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자비’와는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불교에서 ‘자비’라는 가르침이 있는데 이는 수련의 한 방법으로서 실천적인 면을 강조합니다. 이와 비교하여 성경이 말하는 ‘자비’는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말로서 그리스도인이 갖추어야할 인격과 성품을 의미합니다. 외적인 행동보다 내적 성품과 동기를 더욱 중요하게 보는 것이지요.

에베소서 4:32에 보면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2)” 성령의 열매로서 ‘자비, 즉 친절’은 다른 말로 친절, 긍휼, 용서 등으로 표현할 수 있는데, 그 시작은 언제나 하나님의 성품입니다(골3:12-14).

(골 3:12-14)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13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요한일서 1:9에 보면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에는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그는 미쁘시다”는 말은 성실하다는 뜻입니다. 변함이 없으시다는 의미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같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온전하신 용서의 뜻입니다. 인격으로부터 출발하는 용서의 특징입니다.

 

어느 소설에 사형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사건에서 세 명이나 죽였습니다. 사형을 기다리고 있는 어느 날, 한 노파가 찾아옵니다. 그 사형수에게 죽임을 당한 파출부 아줌마의 어머니였습니다. 할머니는 어떤 동기였는지 그 사형수를 용서해보겠다고 떡을 조금 싸가지고 그를 만나러 온 것입니다. 수도 없이 마음으로 다짐을 했지만 막상 딸을 죽인 가해자를 만나니 오히려 울분이 터져 나옵니다.

“왜 그랬니? 왜 그랬어? 왜 죽여야 했니? 이 나쁜 놈아… 돈만 뺴앗고 사람은 놔두지…돈은 또 벌면 되지만 사람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데… 그냥 살게 놔둬도 한 백 년 사는 것도 아닌데…” 주저앉아 꺼이꺼이 숨이 멎을 것 같은 통곡이 나오면서 장내는 울움바다로 변했습니다. 마음은 어떻게든 용서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실패했습니다.

상담자의 기록을 통해 소설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어렵다는 용서라는 것에 어린아이처럼 철없이 도전했고, 인간으로서 실패했습니다. 자신이 패배한 이유가 오만이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대체 어쩌자고 이 할머니는, 그녀의 말대로 배운 것도 없고, 아는 것도 없고, 신앙심도 없는 이 할머니는 그를 용서해보려고 했던 것일까.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인간을 용서하셨다는 기록 이래 인간이 아직도 넘어서지 못하는 그 일을 이 할머니는 대체 무슨 무모함으로 도전하려 했던 것일까.”

그렇습니다. 용서는 어렵습니다. 예수님 말씀하셨듯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주는 사람에게 잘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선으로 악을 대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십자가 상에서 완전한 용서를 시행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3: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마 5:46-48)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눅 6:33)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마 5:43-45)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2. 자비하신 하나님

성경에서 ‘자비’는 주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로마서 2:4 말씀은 “우리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을 표현할 때 ‘하나님의 자비’를 언급했습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운 분입니다. 그 성품은 ‘허물과 죄로 죽어 죄악가운데 행하는 사람들(엡2:1), 하나님께 원수가 되어 있던 사람들(롬5:10)’을 구원하고자 끝까지 참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같은 이치에서 ‘하나님의 자비’의 성품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훈련과 인내로 맺어야 하는 인격의 열매입니다.

(요 15:4-5)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롬2:4)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3. 그리스도를 닮아감

본문에서 자비란 크레스토테스라는 말로 ‘친절’이라는 뜻에 가깝습니다. 이는 처지가 어떠히든지 모든 상황 속에서도 친절하고 선하며, 유익하고 도움이 되며, 온유하고 상냥하며, 사려깊고 호의적인 자세를 의미합니다.

자비는 다른 이들의 마음을 배려해 주고 동고동락합니다. 그것은 완전하고도 깊은 동정심과 긍휼을 경험케 합니다. 그것은 관심을 드러내고 사람이 겪는 상황에 동참합니다. 자비는 고통받는 사람들과 같이 고통받고, 분투하는 사람들과 함께 분투하며, 노력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노력합니다. 거듭 강조하시만 이 모든 노력은 하나님의 마음과 그리스도의 성품과 삶이 모범이 되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맺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훈련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혼자 겪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유혹에 무릎 꿇지 않았던, 그러나 모든 고통을 겪었던 유일한 인간이므로, 우리의 유혹을 완전히 파악하고 그 자비한 마음으로 우리를 도우시는 완벽한 현실주의자이십니다(루이스).

CS 루이스는 ‘피고석의 하나님’에서 말합니다. “기독교는 착취자가 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기생하는 일을 허락하지 않지만, 혼자 힘만으로 살겠다는 꿈도 허락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위해 감수하는 엄청난 희생을 기꺼이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나도 희생하도록 가르칩니다.”

“선을 행하기 위해 치열한 노력을 기울여 보기 전까지는 자기가 얼마나 악한 인간인지 깨닫지 못하는 법입니다. 선한 사람들은 유혹이 어떤 것인지 모를 것이라는 어리석은 생각이 요즘 유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한 거짓말입니다. 유혹에 맞서 싸워 본 사람만이 유혹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압니다. 독일군의 힘이 얼마나 막강한지 알려면 항복할 것이 아니라 싸워 봐야 합니다. 바람이 얼마나 세찬지 알려면 누워 있을 것이 아니라 바람을 거슬러 걸어가 봐야 합니다. 악한 충동과 싸우기 전까지는 결코 그 힘을 알 수 없습니다.”(순전한 기독교)

우리의 긍휼이 하나님의 긍휼을 닮으려면, 자기보호라는 아늑한 세계를 버려야 합니다. 긍휼의 하나님은 지구 저 위에 앉아 우리를 지켜보며 그저 안 됐다고 생각하실 수만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친히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의 본성을 취하시고 말 그대로 인간의 신을 신고 우리 상황과 문제 안으로 들어오셔서 우리와 동행하셨습니다.(팀켈러, 방탕한 선지자)

(겔 18:23)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