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6월 30일 주일예배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들어가는

한 사람의 예를 통해 말씀을 시작하겠습니다.

밥은 활기 넘치는 교회를 통해 청소년기에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 후 청소년부 리더가 되었고, 평신도 대표로서 교회 제직이 되어 봉사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교회에 다니지 않습니다.  언제부턴가 교회가 의무적으로 가야 하는 곳처럼 느껴졌고, 항상 봉사하라는 요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가 모임에 나타나지 않으면 사람들은 문책하듯 했고, 교인 간에 갈등이 깊어지자 그는 교회에 발길을 끊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 기회가 주어지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스스로의 모습이 마땅치도 않지만 다시 교회로 돌아가기에 자신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25,26절은 ‘서로 돌아보고 격려하여 모이기를 힘쓰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이는 교회가 ‘주님께 속한 공동체’로서 마땅히 지녀야할 특성이며 세상 속에 존재하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구원받은 자의 삶을 살아가는 여정에서 ‘이를 격려하고 위로하는 교회’의 역할과 그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오늘은 ‘성도의 인내’를 이루어 감에 있어서 교회의 역할을 생각해보겠습니다.

 

1. 복음의 공동체

우리는 흔히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증거가 있습니까?’ 빌립도 예수님

에게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요 14:8)”. 빌립은 하나님을 보기 원했고 영적인 체험을 하고 영광이 드러나고 능력이 나타나기를 바랐습다. 그러나 그가 볼 수 있었던 것은 말씀하시는 한 사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라고 대답하시는 예수님이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하나님을 환상으로 보거나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증거를 얻기를 혹은 삶의 의미나 목적을 발견하기를 원합니다. 어떤 이들은 영적 체험이나 능력이 나타나기를 바라고 어떤 이들은 이성에 의한 신앙 변증이 사람들을 설득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이들은 교회가 표적을 보여 줘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여전히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교회는 말씀을 선포하는 모임이며, 말씀의 공동체이고 선교의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삶으로 보여주는 공동체입니다. 사도행전의 교회 공동체는 때가 되면 모였다가 흩어지는 공동체가 아니라 ‘함께 먹고 함께 마시며, 소유를 공유하고 살아가는 공동체’였습니다.

그들의 식사 시간은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성찬이었고, 그들이 모여 삶을 나눔은 설교 시간이었으며, 그들이 모여 노래함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송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어린아이들은 내 아이, 네 아이가 없이 모두의 아이들이었으며, 그들이 수고하여 얻은 모든 것은 누구의 것이 아니라 그들의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예배였고, 그들은 한 몸이었습니다.

교회의 삶의 모습이 말씀의 현존이며 ‘하나님을 보여달라는 사람들의 요청’에 우리가 제시할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개별적으로 구원하셔서 개별적으로 천국으로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의 일원이 되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게 하신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게 하는 것 보다 더 확실한 구원이 어디 있을까요.

 

우리는 기회가 생기면 복음을 전해야합니다. 그러나 전도는 관계가 고립된 상태에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전도는 공동체에 생명을 주는 말씀의 실재를 공동체적 삶으로 드러내는 복음 공동체 안에서 가장 잘 이루어 집니다.

(요한복음 13:34-3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스코트랜드의 목사요 신학자인 싱클레어 퍼거슨은 디도서 2:14을 해석하면서 “바울은 이 구절을 포함하여 여러 본문에서, 예수님이 그분을 믿는 고립된 개개인이 아니라 ‘백성’을 만들기 원하신다고 강조합니다. “ (딛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의 구원은 결코 개인적인 것이 아니며, 교회에 속하는 것이 마치 어떤 동아리나 후원모임에 참석하듯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그분의 백성을 위해 죽으셨고,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백성에 속하게 될 때 구원받습니다.

(출6:7)”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계21:3)“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만약 복음이 교회의 삶과 선교의 중심이 되어야한다면, 마찬가지로 교회 역시 복음적인 삶과 선교의 중심이 되어야합니다.

존 스토트 “교회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의 가장 중심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뒤늦게 생각해 내신 것이 아니고, 역사 속에서 우연히 생겨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는 하나님의 새로운 공동체입니다. 영원 전부터 잉태되어 역사를 통해 진행되어 왔고 영원한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의 목적은, 단지 고립된 개개인을 구원해서 우리의 외로움을 영구화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교회를 세우려는 것입니다. 즉 그분의 영광을 위해 세상으로부터 그분의 백성을 불러내려는 것입니다.

 

2. 실천의 공동체

전도와 교회부흥과 관련하여 오해가 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들이 ‘함께 삶을 살아가는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아니라 ‘사람들이 많이 모여야 잘 되는’ 극장 같은 교회가 되고 있습니다. 교회의 이유가 사람들을 교회에 많이 모이게 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강권하여 사람들을 교회의 자리에 앉히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데려다가 교회 좌석을 채우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칭찬받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전도왕이 되어 여기 저기 불려다니고 사람 앞에 세워 성공케이스로 소개하고 성공담을 듣는 것이 소위 ‘간증’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성경 어디에도 그러한 성장주의를 하나님의 뜻이나 하나님의 정의라고 증거한 곳이 없습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교회의 양적 부흥의 기초를 유념해서 보아야합니다. 그들은 사람을 모으기 위한 목적으로 교회 사역을 한 적이 없습니다. 복음이 올바로 증거되고 성령충만의 결과가 성도들의 삶속에서 보여 질 때 그들은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고(행11:26)’ 그 결과로 말씀은 흥왕하고, 날마다 구원받는 수가 더하여 졌다고 기록했습니다.

교회의 의미는 얼마나 많이 모이고 크냐가 아닙니다.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마치 가족이 아침에 자신의 삶의 터전에 나가 애를 쓰고, 저녁에 한 지붕아래 모여 서로 하루의 삶을 위로하고 한 식탁에서 사랑을 나누듯이, 우리는 삶을 나누는 공동체입니다. 자본이라는 거대 악을 뛰어 넘어 소유를 함께 나누는 모임이 되어야 합니다.

‘성도의 인내를 격려하고 위로하기 위해 모이기에 힘쓰는 교회’는 신앙이 녹아있는 삶을 살며 그러한 공동체임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사람들을 모으는 교회’가 아닌, 모임의 의미가 분명해야합니다.

 

3.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오늘 본문의 31절부터 39절은 ‘성도의 인내’에 대해 구체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32절, 성도는 ‘구원의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냅니다.

33절, 비방과 환란으로써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될 수 도 있습니다.

34절, 세상의 소유를 기쁘게 내어주고 영원한 소유를 받습니다.

35절, 믿음의 용기에 위대한 보상이 있습니다.

36절, 약속을 받기까지 인내가 필요합니다.

38절,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삽니다.

39절, 성도의 믿음은 실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성도가 실패하지 않는 이유는 그에게 하나님의 썩지 않는 씨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요일3:9).신자는 견인을 스스로 성취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로 인하여, 믿음의 시작, 진보, 성장, 지속이 있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인내하도록 도우시고 세우시고 보존하십니다.

 

로마서 15:4-7은 여기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말씀합니다. ”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5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6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7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공동체는 이론상으로는 멋지게 들릴지 모르나, 실제로는 고통스럽고 성가십니다. 사람들과 당신의 삶을 나눌 때 서로가 서로를 괴롭게 할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지만 은혜는 우리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우리 자신이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거나 자랑하는 것을 막아 줍니다. 그리고 은혜는 우리를 사랑하게 만듭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떠올리게 하고 형제자매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상기시킵니다 어떻게 그리스도가 그분의 피로 사신 사람들을 피하거나 무시하거나 선심을 쓰는 척할 수 있겠습니까?(행 20:28) 은혜야말로 공동체를 세우는 기초입니다.

 

(고전 13:1-3)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우리가 아무리 문화 속에 잘 참여한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영향력이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세련된 설교를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입니다. 진실로 우리가 선교와 교회에 관한 책을 쓸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합니다. 모임에 출석하고 전도에 참여하고 성경을 다룰 줄 알고 새로 독창적인 일을 시작하고 건전하다(혹은 급진적이다)는 평판을 아무리 받을지라도 하나님의 깊고도 열정적인 사랑에 대한 마음의 반응과 하나님을 향한 깊고도 열정적인 사랑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교사에 관한 격언이 있습니다. “교사는 말을 한다. 좋은 교사는 알기쉬운 말로 설명한다. 훌륭한 교사는 보여준다. 위대한 교사는 감동을 준다.”

감성리더가 갖고 있는 성품입니다. 하나님을 보여주고 하나님으로 인한 감동을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