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확신과 인내

6월 9일 주일예배

로마서 4:17-25

들어가는

위대한 스승이 있었습니다. 그 문하에는 수많은 명석한 제자들이 배움을 위해 모여들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에게 한 가지 불만이 늘 있습니다. 스승께서 모든 똑똑한 제자들보다 유독 바보 같은 제자가 하나 있었는데 그에게만 모든 관심과 사랑을 쏟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제자들이 모두 모여 스승에게 그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그러자 스승은 말했습니다. “내가 그 이유를 보여주겠다. 내일 아침까지 모두 새를 한 마리씩 가지고 모여라.” 다음날 아침 모든 제자들은 새를 한 마리씩 가지고 스승 앞에 나왔습니다. 스승은 문제를 주기를 “오늘 저녁까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그 새를 죽여 가지고 다시 모여라.”

제자들은 즉시 흩어져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은밀한 곳으로 가서 자기 새를 죽여 다시 돌아왔습니다. 오후가 되자 스승 앞에는 죽은 새들이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저녁이 되어 어두워지는데 그 바보제자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이 그 바보제자를 비웃는 소리로 교실은 시끄러웠습니다.

아주 컴컴해져서야 그 바보제자는 돌아왔습니다. 그렇지만 손에 새는 살아있는 채 들려있었고 바보제자는 온통 몸이 땀으로 젖어 초췌해 보였습니다. 스승은 물었습니다. “너는 왜 아직 새를 죽이지 못하고 있었느냐.” 바보제자는 대답했습니다. “예. 스승님. 아침부터 저녁까지 제가 아는 모든 곳에 가보았습니다. 마루 밑, 지하실, 다락, 동굴, 산골짜기 심지어는 최고 높은 산꼭대기까지 가보았지만 그 어디에도 신이 없는 곳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새를 죽이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죄송합니다.” 바보제자의 그 말 한 마디에 주변은 조용해졌습니다. 스승은 말했습니다. “이것이 내가 이 제자를 사랑하는 이유이다.”

올바른 신지식을 갖는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으로 배우는 것과는 다릅니다. 온 마음과 전 인격이 하나님에 대해 반응하는 것입니다. 칼빈은 그 확신을 위해 ‘힘든 투쟁’이 있어야한다고 합니다. 성도가 하나님과 구원에 대해 확신을 갖는 것과 성도의 인내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마음으로 믿고 신뢰함이 없이 성도의 인내와 고난에서의 승리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해 그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성도의 확신이 아닌 것

(히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성도의 확신이 아닌 것 세 가지를 경계했습니다. 맹신과 동의 그리고 도덕적 추측입니다.

  • 맹신

“맹신”은 구원의 진리에 대한 탐구 작업을 교회에 일임해 버리고 교회가 가르쳐 주는 것은 모두 진리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태도입니다. 칼빈은 천주교회가 갖고 있는 그러한 맹종의 태도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 동의

신앙을 “동의”assent 정도로 취급하여 “지식에서 나오는 단순한 동의”a bare and simple assent arising out of knowledge를 믿음과 동일시하고 “마음의 확신 confidence and assurance of heart”를 믿음의 본질에 포함시키지 않는 입장(3.2.33)을 말합니다.

무신론적 철학과 과학도 이에 해당합니다. 소설가 줄리안 반스는 “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 단지 그리워할 뿐이다.” 유명한 천체과학자 스티븐 호킹은 그의 유작에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도 우주를 관장하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오늘 본문 20-21절은 아브라함이 그와 같은 “지식의 한계와 자의적 동의”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이 약해지지 않은 모습을 보여줍니다(히브리서 11:8-19 참조).

  • 도덕적 추측

“도덕적 추측”에 의해 구원의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사람마다 자신은 중생의 증거로 내세울 만한 도덕성이 있다고 여기는 태도입니다. 칼빈은 “추측이나, 의심과 비슷한 어떤 것”보다 믿음과 상극에 있는 것은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만일 “도덕적 추측”이 우리의 확신의 근거가 된다면 지금은 자신의 모습을 볼 때 자기가 은혜 안에 있는 것처럼 생각되나 내일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3, 2, 40).

 

2. 성도의 확신

칼빈은 믿음의 본질적 특성 중에 “확신”(assurance, securitas)을 강조했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의에 대한 확고한 지식, 즉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의 “마음에 인쳐 주심”으로써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믿음에는 단지 머리만이 아니라 “마음”의 기능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믿음이 지식이라 할 때는 그 지식은 머리로 하는 이해comprehension보다는 마음의 확신 assurance에 더 가깝습니다(3, 2, 14). 칼빈에게 있어 진리에 대한 “동의”는 “머리보다는 마음, 이해보다는 성향(disposition)”에 관한 것입니다(3, 2, 8). 믿음은 지식이지만 단순한 지성적 이성적 기능으로 얻을 수 있는 일반적 세상 지식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지식입니다. 그것은 인간 오감으로 파악하는 이해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감각적 지각sense perception에 해당하는 그러한 종류의 이해”가 아닙니다(3, 2, 14). 그것은 성령의 조명과 인치심의 결과로 얻을 수 있는 영적 지식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장’이라고 합니다. 많은 신앙 선조들의 믿음에 대해 설명하면서 가장 많은 부분을 아브라함의 믿음과 인생역정을 보여줍니다. 거기에는 그의 소명과 순종, 소망과 자손, 약속과 순례, 헌신과 부활신앙의 모든 삶이 요약되어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가 죽은 자를 살리실 하나님을 믿고 행동했다는 것이며, 하나님은 이것으로 그의 의를 ‘인정’하셨다는 것입니다.

 

(히 11:8-19)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9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14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15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18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의 신앙여정은 창세기 12장에서 시작하여 21장에서 그가 아들 이삭을 낳기까지 25년의 세월이 흘렀고, 창세기 22장에서 이삭을 제물로 드리던 사건까지는 그 후 약 15-20년의 세월이 또 흐릅니다.

(창21:33)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3.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을 안다’는 신지식은 무조건 믿는 맹신이 아니고, 배워서 동의하게 되는 지식도 아니며, 착하게 행동하는 것을 보니 알겠다는 도덕적 추측도 아닙니다. 칼빈은 이 세 가지를 경계하면서 구원의 확신을 얻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 그의 유명한 저서 ‘기독교강요 3.2.16)에서 강조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본래 불신으로 향하는 고질적인 경향이 있으므로 ‘힘든 투쟁’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해 확신이 생긴다고 주장했습니다.

믿음의 지적 의지적 동의만을 강조하는 현대 복음전도론 또한 ‘구원얻는 믿음’을 단지 자연인의 의지적 결단에 달려 있는 것으로 가르침으로써 칼빈이 경계한 바 ‘스콜라주의적’ 믿음으로 회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올바른 신지식은 맹신, 동의, 도덕이 아닌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전인격적인 반응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지식을 얻기 위한 한 과정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의 객관적 계시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고백 되고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구원의 확신은 지식을 획득하고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힘든 투쟁’의 과정을 통해 말씀이 인격화되고 성령의 ‘인치심’으로 인격이 변화되어 거룩해지는 성화의 과정에 더 깊은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확신은 경건의 출발이 됩니다.

 

(야고보서 1:2-4)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누가복음 21:19)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로마서 5:3-4)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