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넘어서는 마음

7월 21일 주일예배

경계를 넘어서는 마음

에베소서 2:11-22

들어가는

지난주에는 ‘그리스도인과 친절’이라는 주제로 그 중에 성경에서 친절이 나타나는 형태로 세가지 겸손, 환대, 칭찬 중에서 특별히 ‘환대’라는 소주제를 좀 더 깊게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른 봄 가지런히 손질된 잔디밭 귀퉁이에 노란 민들레가 하나 피었습니다. 지나는 사람들 중에는 녹색 잔디위에서 유난히 돋보이는 민들레의 노란색이 예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집주인에게 민들레는 그리 반가운 꽃이 아닙니다. 정성 들여 가꾼 잔디를 망가뜨리기 때문이지요. 곁에서 잔디는 말합니다. “여긴 네가 자랄 곳이 아니야.” 민들레는 대답합니다. “주인이 예쁜 꽃을 보면 좋아하지 않을까?” 그러나 그 희망이 무색할 정도로 주인은 당장에 민들레를 뽑아버립니다.
아프리카에 가면 야생화로 유명한 평원이 있습니다. 봄이 되어 그곳에 가면 바닷가 넓은 평원에 갖가지 야생화들이 카페트처럼 수를 놓고 있습니다. 거기서 야생화는 군락을 이루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어느 집 잔디밭에 들어오면 잡초일 뿐입니다. 환영 받지 못합니다.
어느 사회에나 소외 계층은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나그네를 영접하고 후대하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환대를 낭만적으로 이해할 경우가 많습니다. 지나가는 행인에게 약간의 도움을 주고, 새신자가 교회를 찾아오면 손을 들어 노래를 불러주고 꽃을 건네주면 환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모든 행태들의 대부분은 언제나 나와 너를 구분하고 힘을 가진 자가 힘이 약한 자에게 베풀어주는 임페리얼리즘, 제국주의적 적용입니다. 그러나 사실상 성경적 환대에는 다는 다른 접근과 기초를 갖고 있음을 알아야합니다.

 

1. 창조적 소외

성경은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롬12:13)하고, 함께 거주하는 타국인을 자기 같이 사랑해야 한다고 교훈합니다(레19:33-34). 그리고 그 이유가 ‘너희도 애굽 땅에서 객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레 19:33-34) 타국인이 너희 땅에 우거하여 함께 있거든 너희는 그를 학대하지 말고 34 너희와 함께 있는 타국인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객이 되었더니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인류가 하나님을 떠난 이후 죄악은 가속력을 갖고 인간사회를 극한 타락으로 몰아갔습니다. 심판의 홍수가 있었지만, 홍수는 죄인은 멸할 수 있었지만 죄악을 없애지는 못했습니다. 홍수 후 바벨탑과 언어혼란의 원인 또한 죄의 문제였습니다. 그 이후 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시는데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나그네’에 관한 하나님의 특별한 뜻을 이해하는 단초를 찾을 수 있습니다.
(창 12:1-2)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창세기 12장 아브라함의 소명에 관한 히브리서11장의 관점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이 순종할 때에 아브라함의 믿음이란 ‘가나안 땅에서 중심부가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믿음의 최종 목적지는 ‘하나님의 성’이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전체가 들려주는 웅변은 이 땅에서 나그네 되어 살아가는 모습은 ‘하나님의 더 좋은 것’에 대한 믿음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히 11:8-10)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9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성도가 보여주는 ‘이 땅에서의 나그네의 삶’은 신앙인의 인생 스타일입니다. 나그네의 삶을 참고 견디어 세상에서 중심이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중심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목적지가 아닙니다. 세상의 중심을 지나서 ‘하나님의 도성’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세속의 도시를 지나 천국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구속사와 함께 하는 ‘창조적 소외’입니다. 기독교에 있어서 나그네는 세상의 중심으로부터 불러내어진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중심이 되기 위해 나그네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본향으로 가기 위한 하나님의 여정입니다. “너희도 애굽 땅에서 객이 되었더니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레19:34). 그것이 믿음의 여정이며 하나님을 찾는 자들의 삶의 방식입니다.
예수님은 철저히 주변부(marginality)였습니다. 버림받은 이방인, 세리, 여성, 가난한 자, 억압받는 이들과 영문 밖에서 어울렸습니다. 주도(主都)인 예루살렘이 아닌 갈릴리에서 줄곧 활동했습니다. 현대 교회의 타락은 스스로 주변부를 포기하고 중심부로 자리를 옮겨 앉으면서 시작됐습니다. 보수 중앙 정권과 보수 대형 교회, 얼마나 잘 어울리는 한 쌍입니까.
이정용 교수는 그의 저서 ‘마지널리티Marginality’에서 예수님의 주변성이 상징하는 의미를 상실할 때 교회의 설 자리가 없다고 경고합니다. 주변부가 설 자리가 없는 나라 또한 그 끝이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창조적이 된다는 것은 주변 중 주변, 즉 창조적인 중심에 머무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의 억압 속에서 다른 종교·문화 집단에 거부된 주변부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의 중심 배경을 포기하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와 더불어 생겨난 기독교는 중심성에 근거한 가짜였습니다. 이 기독교는 중세의 강력한 교황제로 발전했고 세속 권력조차 교회의 탐욕을 막지 못했습니다. 가짜 기독교의 역사는 지금도 이어져 자본주의와 결탁하며 중심부 이데올로기를 조장하고 있습니다. 욕심과 탐욕, 종교가 가장 멀리해야 할 덕목을 가장 가까이에 두었던 부패한 구교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그렇게 무너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미국 상원의 채플 목사였던 리처드 핼버슨 목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로 이동해 철학이 되었고, 로마로 옮겨가서는 제도가 되었다. 그 다음에 유럽으로 가서 문화가 되었다. 마침내 미국으로 왔을 때, 교회는 기업이 되었다”

 

2.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됨

갈라디아서 3:28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종족과 문화, 신분과 성별의 경계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뛰어 넘습니다.
이 대표적인 공동체의 모습은 출애굽하는 이스라엘에게서 보여집니다. 출애굽기 12:38에 보면 출애굽 이스라엘은 혈통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중다한 잡족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생축이 그들과 함께 하였으며…” 그후 48,4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와 함께 거하는 타국인이 여호와의 유월절을 지키고자 하거든 그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은 후에야 가까이하여 지킬지니 곧 그는 본토인과 같이 될 것이나 할례받지 못한 자는 먹지 못할 것이니라 49 본토인에게나 너희 중에 우거한 이방인에게나 이 법이 동일하니라.” 다시 말해서 출애굽 이스라엘은 혈통에 의해 닫혀진 사회가 아니라 할례에 의해 열려진 사회였습니다. 이스라엘을 포함하는 ‘중다한 잡족’은 믿음에 의해 하나가 된 신앙 공동체였습니다.
오늘 본문 역시 같은 생각을 전합니다. 19절에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했습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다고 증거합니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평안이 같습니다(엡 2:17).
코스모폴리타니즘(cosmopolitanism)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보편주의가 만인 평등만을 강조하는 것과는 달리 코스모폴리타니즘은 평등과 차이를 동시에 강조합니다. 개인 간의 차이는 역사와 전통에서 발생한 것임을 인정하고, 개인은 타인에 의해 재정의되며 더욱 풍요로워집니다. 세계화(globalization)가 경제적 측면만을 강조하는 데 반해 코스모폴리타니즘은 타인과의 관계를 중요시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실 때 다양하게 창조하셨습니다. 자연이 서로 다르고 사람들이 서로 다릅니다. 고린도전서 15:39-41에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그리스도안에서 하나가 된다는 뜻은 개체의 다양성이 부정된다는 것이 아니라 다양함이 조화를 이루어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회적 의미로 적용한다면 ‘성경적 코스모폴리타니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고전 15:39-41)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40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41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사회주의적 보편주의는 근대의 공산주의 국가를 만들었고 그 피해가 어떤 것인지 우리는 역사를 통해 보았습니다. 폐쇄적 민족주의는 부의 양극화 현상을 가속시키고 있으며 일부 부국들은 자국을 보호하기 위해 경계를 허물기는 커녕 더욱 굳건히 장벽을 세우고 있습니다.
2014년 4월 19일자 「뉴욕타임스」에는 슬픈 기사가 실렸습니다. 12살의 소녀가 보호소의 화장실에서 샤워 커튼을 거는 막대에 목을 매달아 자살했다는 것입니다.
“남미의 에콰도르에 살던 노에미라는 소녀가 뉴욕으로 불법 이주한 부모에게 가기 위해 함께 살던 조부모의 집을 떠나 작은 가방만 하나 달랑 들고서 10,000km 넘는 곳에 있는 뉴욕시에 도달하기 위한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조부모 집을 떠난 후 5주 동안 그녀는 그녀의 부모로부터 돈을 받고 사람을 밀반입하는 사람들을 포함해서 낯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지냈습니다. 노에미와 밀반입자는 멕시코에서 경찰에 체포되었고, 노에미는 아동보호소로 보내졌습니다. 검사의 심문을 받은 후 그 소녀는 슬픔을 가눌 수 없는 것처럼 울었다고 합니다. 부끄럼 많고 공부하기를 좋아했다는 어린 소녀 노에미는 6,000km 이상의 여행을 낯선 사람들과 함께 하면서 부모에게 도달하기까지 4,000km를 남겨놓고서 붙잡힌 후 심문을 당했고, 사흘 후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마감한 것입니다. 그 소녀가 자살한 아동보호소의 이름은 아이러니컬하게도 <희망의 집>이었다고 합니다. 무엇이 그 어린 소녀를 그렇게 만든 것일까? 그런데 이렇게 국가적 “경계” 때문에 일어나는 이러한 사건들은 점차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미국으로 불법 이주한 부모와 만나기 위해 중남미에서 이렇게 어린아이들이 혼자서 먼 길을 떠나는 사례가 2011년에는 6,560건이었는데, 이후 1년에 6만 건이 되었다고 합니다. 노에미가 자살한 3월 11일 주간에만 멕시코 경계를 넘으려던 370명의 어린아이들이 붙잡혔는데, 그중 절반 이상이 혼자서 여행하던 아이들이었다고 합니다.“
갈라디아서 3:28, 에베소서 2:19은 기독교적 코스모폴리터니즘의 예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집단 이기주의의 경계와 장벽을 넘어서야 합니다.

 

3. 나그네를 자기같이 사랑하라

레위기 19:33-34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타국인이 너희 땅에 우거하여 함께 있거든 너희는 그를 학대하지 말고 34 너희와 함께 있는 타국인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객이 되었더니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앞서 말씀드렸듯 성도는 모두 세상에서는 나그네로 창조적 소외자로 살아갑니다. 그것은 동양사상에서 말하는 ‘고진감래’ ‘진인사대천명’ 어려움을 극복하고 최선을 다하면 출세의 길이 열리고 좋은 시절이 온다는 뜻과 다릅니다. 우리는 오히려 세상의 중심에서 불려져 나와 천국 도성을 향해 가는 새로운 나그네입니다. 그런 기초위에서 우리는 모두 하나입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가 모두 한 가지의 모습으로 획일화되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안에서 천국시민으로서 하나를 이루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나그네의 권리’에 대해 생각해봐야합니다. 이는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로 바꾼다면 인권이라고 생각해도 될 겁니다. 누군가가 권리를 주장한다면 그 권리를 실행해줄 책임과 의무를 지닌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 의무를 지닌 사람이 실행하지 않으면 정의롭지 않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는 부유한 나라에서 가난한 나라에 보조를 해준다고 가정해 봅니다. 자선(Charity)의 개념에는 ‘시혜자와 수혜자’ 사이에 도덕적 위계구조가 형성됩니다. 시혜자는 ‘베푸는 사람’이 되고 수혜자는 ‘받는 구걸자’가 됩니다. 시혜자는 도덕적 우월성을 지니게 되고, 수혜자는 도덕적 열등성을 지닌 존재가 됩니다. “물질적 불평등”이 “도덕적 불평등”으로 연결된다면 그야말로 불평등한 것이 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기독교의 나그네 의식’의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는 모두 하나입니다. 성경적 코스모폴리타니즘 입장에서 본다면 부자가 빈자가 될 필요는 없지만 ‘한 공동체의 책임과 의무’를 지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도덕적 불균형’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부한 나라는 책임질 의무가 있고 가난한 나라는 요청할 권리가 있습니다. 물적으로 가난한 것이 도덕적 열등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부를 향유했다고 해서 도덕적 우월성까지 전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 가정에 자녀들이 태어났습니다. 다섯명의 자녀가 태어났는데 그 중 한 명이 발달장애가 태어났습니다. 그렇다면 가족들은 모두 함께 책임을 집니다. 가정에서 태어나고 양육받은 혜택에는 장애 형제를 책임져야할 의무가 함께 존재합니다. 같은 이치로 마을이 함께 책임지고 국가가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똑똑하고 정상적인 자녀만 택하고 장애아는 유기한다면 정의롭지 않은 것입니다.
성경에서 나그네를 환대하는 것은 ‘자기 같이 사랑한다’는 원칙이 적용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