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성장하는가

7월 28일 주일예배

우리는 성장하는가

에베소서 4:13-16, 29-32

들어가는

이달에는 그리스도인과 친절이라는 제하에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마지막 시간입니다. 둘째주에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친절이란 세 가지 형태로, 겸손과 환대, 그리고 칭찬이라고 정리했었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 윤리적인 행동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기초로서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성품이라고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에베소서 4장에는 많은 중요한 주제들이 논의되고 나서 마지막절에는 ‘친절’이라는 주제어가 상징적으로 제시되고 있는데, 이는 곧 그리스도인의 성장으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오늘은 여기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3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그리스도인의 친절과 긍휼과 용서는 우리가 받은 바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용서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가 된 우리는 성장합니다. ‘사랑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 까지’ 자랍니다(15절).
용서받은 이후 그리스도인들은 행함을 통해 성장합니다. 성장은 삶의 의미를 찾고 지복을 만나는 행복을 누리게 하지만, 성장하지 않는 삶은 비극적 종말을 맞이합니다. ‘친절’을 포함하는 그리스도인의 행동은 성장으로 이어집니다. 성장의 목표는 그리스도이며, 유기적 연합을 통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게 합니다.

 

1. 성장은 필요한가

(15절)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리스도인의 성장은 필연성을 갖고 있습니다. 생명이 있으면 생명활동이 있어야합니다. 그것이 없다면 죽은 것입니다. 생명체는 숨을 쉬어야하고 맥박은 뛰어야합니다. 멈추어 있다면 죽은 것입니다. 세포는 분열하고 죽은 세포는 소멸하고 새로운 세포로 대체 작용이 있어야 합니다. 생명이 있다면 마땅히 그래야합니다.
은혜를 입은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유기적 공동체가 됩니다. 모든 생명이 성장하듯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우리는 성장해야 합니다. 예수를 믿고 천국가는 것으로 끝나면 얼마나 편할까요.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은혜를 입은 이후 끝없는 성장의 도전에 직면합니다. 그럴 때는 신앙 생활이 힘들고 부담이 된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리나’라는 명작이 있습니다. 고등학생 시절에 세계명작으로 읽었던 소설이었는데, 얼마전 고려대 노어노문학과 석영중 교수의 강의를 대하면서 깊은 인상을 받아서 여러분과 일부를 나누어보려고 합니다.
석교수는 톨스토이의 작품 세계를 성장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조명을 하고 있는데 ‘사람이 성장하는 조건을 몰입, 소통, 죽음의 기억’이라고 분석합니다. 제가 모든 내용을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주 훌륭한 인사이트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안나 카레리나에 등장하는 레빈이라는 인물은 그 아내 키티와 함께 성장하는 부부입니다. 레빈은 ‘몰입’이라는 특별한 경험을 통해 생각의 전환이 일어나고 그 후의 인간관계는 ‘소통’이라는 새로운 국면을 만납니다. 그리고 ‘죽음’이라는 생각의 위기를 겪으면서 삶의 의미와 기쁨, 더할 나위 없는 인생의 행복을 경험합니다.
성장을 통해 성도는 인생의 기쁨과 복을 경험합니다. 왜냐하면 성장의 끝이 하나님의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2. 어떻게 성장하는가

(에베소서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성장에는 세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첫째는 변화와 전환, 둘째는 연합과 소통, 셋째는 충만한 생명입니다.

 

1) 변화와 전환

성장을 위해서는 첫째 단계는 변화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32절은 말씀합니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주기도문에서도 밝혔듯이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우리가 용서한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용서하는 태도에서 용서받은 자임이 확인됩니다.
헬라어에서 ‘메타노니아’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는 ‘전체 인생에 영향을 미칠 만한 어떤 크고 강렬한 변화’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셨을 때 ‘회개’라는 말이 같은 단어입니다. 인생의 커다란 전환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오늘 에베소서 4:1에서는 ‘부르심을 받은 일’이라고 표현합니다.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2) 연합과 소통

변화와 전환이 일어난 후에는 관계가 바뀝니다. 이전의 옛사람,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22절)은 벗어 버려야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새롭게 되어 (24절)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진정한 대면이 이루어지고 나서 세상에 대한 우리의 관계는 변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20에서 증거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톨스토이는 ‘인생의 길’이라는 책에서 말합니다. “이승에서 인간이 얻는 최고의 행복은 사람들과의 융합과 일치이다.” 아무리 나 혼자 이 승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잘 누리고 있다한 들 그것이 얼마나 우리에게 보람과 기쁨이 되겠습니까 그 행복은 오래 지속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사람들과 공감해야 합니다. 사람들과의 융합과 일치가 공감입니다.

 

3) 충만한 생명

그리스도인은 긍정적입니다. 친절은 긍정성입니다. 성도가 낙관적 태도를 지키는 것은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기 때문입니다.

친절한 성품의 사람은 칭찬을 잘 합니다. 항상 사람들에게서 긍정적인 면을 찾기에 익숙하고 칭찬해주려 노력합니다.

냉소적이지 않습니다. 좋은 결과에는 칭찬해주고 나쁜 결과라 할지라도 낙심하지 않도록 격려합니다.

비관적인 태도와 경멸하는 말들은 그리스도인의 자랑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현실감각도 아닙니다. 핑계를 찾기에 익숙하고 책임을 다른 사람들에게 돌립니다. 함부로 말하는 것이 화통한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상황에서든지 좋은 점을 찾아 칭찬해주고 불편한 환경에서도 긍정적입니다.

30절에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에서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31절)’ 입니다. 그 모든 것들은 버려야합니다.
(에베소서 4:17-20)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성장은 우리에게 기쁨과 행복을 줍니다. 성장의 기쁨은 단순한 행복, 욕구가 충족되었을 때 느끼는 행복, 그 이상입니다. 이것은 보통 말하는 조건의 충족을 통한 행복은 아닐진대, 굳이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지복(felicity)입니다. 더 없는 행복이라 할 수 있다. 성장은 일시적이 아닌 지속적인 기쁨을 선사합니다. 그 밖에 다른 기쁨, 다른 만족은 금방 끝납니다. 그래서 더 많은 욕구에 대한 충족을 우리에게 요구하지요. 그러나 이런 기쁨은 오래가고 지속됩니다. 이러한 기쁨은 세상을 더 아름답게 하는 힘이 됩니다.

 

우리는 점검해야합니다.

  • 내가 성장하는지
  • 공동체가 성장하고 있는지
  • 전환, 즉 하나님의 은혜는 무엇인지 인식하고 있는지
  • 소통, 교감과 감동이 있으며 소통으로 강건한지
  • 충만한 생명감이 있는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