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뻐하는 마음

2월 17일 주일예배

빌립보서 4:4-13

들어가는

그리스도인의 기쁨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지난주는 기쁨의 의미에 대해 세 가지로 나누어서 첫째 신자의 기쁨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기초하고 있고, 둘째 십자가에서 구원이 이루어지듯 진정한 영적 기쁨은 고난 속에서 발견되며, 셋째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 마음을 주장할 때 진정한 기쁨이 찾아옴을 생각해보았습니다.

보스턴 대학의 다니엘 길버트 심리학과 교수는 행복지수를 연구했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복권에 당첨하거나 승진하는 등의 좋은 일이 생기면 행복지수가 올라가고 사고를 당하거나 어려운 일을 당하면 행복지수가 낮아진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짧게는 며칠 적어도 3개월 이내에 다시 이전 마음 상태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이런 일들을 반복하면서 늘 자신의 기본 행복지수에 머무른다는 겁니다. 자신의 ‘기본 행복지수’를 높이려면 자기 존중감이 높아져야 한다고 합니다. 자기 스스로를 존귀하게 생각하고 자신의 삶에 대한 긍지를 가지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 까요.

오늘은 성경본문을 통해 ‘기뻐하는 마음: 그리스도인이 지속적인 기쁨을 유지하는 마음의 구조’에 대해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먼저는 마음의 구조에서 기쁨이 차지하는 중요성에 대해, 다음으로는 그 마음의 틀을 무엇으로 채우는지에 대해 차례로 생각해봅시다.

 

1. 마음의 구조와 신자의 기쁨

옛말에 ‘세 살 적 버릇 여든 까지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일생을 살아가는 마음의 구조는 대부분 어릴 적에 형성이 됩니다. 사실상 그 때는 지금 나의 기억에는 존재하지 않는 때입니다. 그 마음의 구조는 성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요소에 의해 형성되고 굳어져갑니다. 그것을 가리켜 우리는 여러 가지 단어로, 철학에서는 세계관, 신학에서는 라이프시스템 Life-System(아브라함 카이퍼) 등으로 표현하는데 사람의 기본적인 마음 구조를 말합니다.

한 사람이, 크게는 한 민족이 한 세대를 살아가면서 겪는 수많은 일들을 담고 바라보는 그 세계관, 인생체계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가 ‘즐거움 Entertainment’입니다.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면서 기쁨을 얻는가. 어디에서 재미를 느끼는가 하는 것이지요.

앞에서 인용한 길버트 교수의 ‘행복지수 연구’에서 말하는 기본 행복지수가 여기에 연결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좋은 일을 만나서 행복하거나 슬픈 일로 불행해졌다가 다시 예전 행복지수로 돌아갑니다. 거기는 어디이며 그것은 무엇일까요.

기쁨도 마찬가지입니다. 간혹 우리는 변화무쌍한 삶 속에서 어느 순간에 보면 어디론가 다시 돌아온 느낌을 받습니다. 예전에 재미를 느꼈던 일들, 예전에 즐거워했던 순간을 다시 찾아보려고 하는 겁니다. 그 재미라는 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같지는 않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거기서 우리는 행복한가요? 많은 경우 거기서도 실패합니다. 좋아하는 일에 집착했을 때 돌아오는 것은 많은 경우 허무함과 공허감입니다. 그것도 별반 나을 것이 없다는 것이지요. 성경은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라고 말씀합니다(요일2:15-17). 다 속절없이 지나가고 ‘모든 것이 헛된 느낌’만 남는다고 합니다(전1:2-3).

  • (요일 2:15-17)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 (전 1:2-3)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떤 분들은 그것을 가리켜 ‘자신을 찾는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그 ‘재미와 즐거움’이 정작 무엇이냐고 물으면 딱히 떠오른 것도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재미를 찾아다녔던’ 기억은 있지만 ‘찾아본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잘못된 곳에서 찾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히11:15-16). 우리가 돌아갈 본향은 땅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다고 합니다.

창세기 1:26-27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찾는다’고 한다면 거기서 찾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갖고 있는 진정한 자아로서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우리는 그 본질로 지어졌습니다. 하나님처럼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나면서 자유를 찾아보려고 하는 데, 진정한 자유는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 (히 11:15-16)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 (창 1:26-27)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현대심리학에서 이럴 경우 많이 인용하는 것이 자존감입니다. 자존감은 자신감과 구별하여 사용합니다. 자기존중과 자기존경은 다릅니다. 존중은 특색이나 가치를 인정해주는 것이고 존경은 훌륭한 부분에 대해 경외하는 마음입니다. 자존감이 낮으면 열등감이 생기고 잘난 척을 하기도 하고 심한 경우는 왜곡된 자신감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늘 열등감 – 잘난 척 – 자신감 – 왜곡된 자기 존경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를 주의해야합니다.

자존감은 많은 경우는 대부분 좋은 환경에서 사랑받으면서 자라온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요즘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최고의 성장환경을 만들어주려고 애를 많이 씁니다. 그러나 그런 면으로만 본다면 사도 바울은 최고의 자존감을 가져야할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예수를 만나기 전까지는 자기존경감 혹은 자신감은 넘쳤겠지만 진정한 자기존중감은 없었습니다.

고린도전서15장에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대목에서 그는 이전의 자신을 가리켜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같다고 표현했습니다. 반면에 예수를 만나고 변화된 자신에 대해서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않았다”고 표현합니다 (고전15:3-10).

  • (고전 15:8-10)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2. 마음의 그릇을 채우다

A. 관계는 관용으로 채웁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5절)”고 했습니다.

B. 염려는 기도로 채웁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6절)”

C. 마음은 평강으로 채웁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7절)”
이 말씀을 골로새서 3:16 말씀과 비교해보십시오. “(골 3: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여기에서 하나님의 평강의 근원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빌4:13)

 

기쁨의 근원은 하나님의 채우심입니다.

  • (빌 4:11-13)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