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자유

1월 6일 주일예배

 

갈라디아서 Gal 5:1-6
들어가는 말

오래 전에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로마서 4:3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했는데 야고보서 2:21은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합니다. 성경이 서로 다른가요?’ 당연히 물을 수 있는 질문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칼빈의 ‘이중칭의(double justification)’라는 말을 공부할 필요가 있습니다.

칼빈의 이중칭의(double justification)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죄를 지어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아버지가 보석금으로 죄값을 치러주어 석방을 받게 되었습니다. 죄가 있지만 죄값을 치러주었기 때문에 ‘죄가 없다’고 인정해줍니다. 이것이 칭의입니다. 그 죄인이 석방을 받아서 착한 일을 했는데 사람들이 ‘전과자’라고 믿어주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의 선행을 받아 들여줍니다. 이것이 이중칭의의 예입니다.

칼빈이 직접 작성한 제네바 교리교육서의 ‘행위편’에는 이것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칼빈에 따르면 신자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처럼, 행위 또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습니다. 우리는 육신 가운데 언제나 결함이 있으므로 행위는 언제나 죄에 더럽혀져 있습니다. 오직 신앙안에서 행해지는 행위에 대해 하나님께서 그 죄성을 그리스도의 거룩으로 덮어 주시고 온전한 것으로 간주해 주셔야만 신자의 성화는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를 얻듯 행위 또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아야 합니다.

  • (로마서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 (고전 1:30)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믿음과 행위

갈라디아서 5:2은 하나님 앞에서 도덕적인 선행은 ‘아무 유익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신자라 할지라도 아직 죄의 부패으로부터 자유롭지는 않습니다. 신자의 선행이나 경건이 의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우리 안에서 ‘그 기쁘신 뜻을 두고 행하시는’ 성령의 도우심과 하나님의 인정하시는 은혜가 없다면 우리는 ‘무익한 종’일 뿐입니다. 오직 신자가 그리스도안에서 믿음의 표현으로 행함이 이루어지고 하나님께서 이를 의롭다 하실 때 성도는 거룩해지고 이는 영원한 ‘상급’이 되는 것입니다.

  • (엡 2:8-9)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 (딛 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 (갈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 (약 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율법과 율법주의

신자가 죄를 고백하고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내가 스스로 구원할 수 없다’고 믿고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갈라디아교인들 중에는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즉 인간공로를 위주로 하는 자율종교, 선행종교의 방법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철저한 하나님 중심의 신앙이 의심에 사로잡히고 하나님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생각이 들 때 우리는 종종 율법주의나 선행 또는 고행종교의 모순된 길을 걸어갑니다.

율법과 율법주의는 다릅니다. 말씀으로서 율법은 ‘우리의 영혼을 소성케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지도자에게는 지혜를 주고(수1:8), 영적으로 풍성한 삶을 살게 만들어 줍니다(시1:1-2). 그러나 율법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음의 근거가 되지 못하고 도덕적인 가치와 행위의 기준으로만 남을 때 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 (시 19:7)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 (수 1: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 (시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리스도인의 자유

자유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소극적인 측면에서 ‘억제로부터의 자유’가 있고, 둘째는 적극적인 측면에서 ‘스스로 억제할 만한 능력으로서 자유’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교도소에 갇혀 있다가 형기를 마치고 풀려난다면 소극적인 면에서의 자유입니다. 시민사회에서 양심과 도덕을 지키며 스스로 감정과 의지를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외부적으로 통제하지 않고 자유롭게 삽니다. 적극적인 면에서의 자유를 누리면서 사는 거지요. 갈라디아서 5:1에서 ‘자유케하려고 자유를 주셨다’는 말씀은 ‘자유를 누리게 하려고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우리를 죄의 멍에로부터 자유롭게 하실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자유를 누리게 하십니다.

존 맥아더 목사는 ‘기독교는 두 물결이 교차하는 지점 위에 놓인 좁은 다리 같다’고 비유합니다. 한 쪽은 수정같이 맑은 율법주의 조류입니다. 빠지는 즉시 우리는 산산조각으로 부숴져 죽게 될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더럽게 혼합된 자유사상입니다. 그들은 모든 종류의 율법과 절대가치를 배격합니다. 그 속으로 떨어지면 오물의 늪에 빠져들어 죽게 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6절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뿐이라고 말씀합니다. 율법주의이건 자율종교이건 둘 다 구원에 있어서 진정한 효력이 없습니다. 그들은 마치 스스로를 감옥에 가두고 ‘종교의 굴레’로 자신을 강제하면서 스스로 갇혀 사는 모습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자유하다는 의미는 외적인 형식에 속박되지 않고 내적 가치와 사랑의 동기로 행동한다는 뜻입니다. 믿음은 ‘역사하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생명이며 생명은 역동성이 있어야 합니다. 신자가 받은 은혜는 이중은혜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도 은혜이며, 아직도 죄의 영향 속에 있는 부족한 선행을 의롭다 하시고 ‘거룩하게’하시고 ‘상급’을 주

심도 은혜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경건은 율법의 행위가 아닙니다. 은혜에 응답하는 감동과 감사의 역동적인 표현입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