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 2019 (1)

11월 25일 주일예배

 

시편 Psalm 37:1-6
들어가는 말

2019년을 앞두고 많은 기관과 단체들 혹은 개인들이 나름대로의 미래 예측을 내놓고 있습니다. 어떤 내용이든지 공통적인 것은 인터넷과 첨단 기술을 중심으로 변화하는 사회라는 것과 그 변화의 속도가 지금 우리들의 일반적인 생각의 속도보다는 훨씬 빠르다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지금 우리는 시대변화의 급류를 타고 흘러가면서 이미 목적지를 지나쳐서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을 가능성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쎈터 김난도 교수팀이 2019년에 유행할 키워드를 몇 가지 제시했는데, ‘컨셉팅’, ‘감정대리인’, ‘세포마켓’, ‘밀레니얼 가족’ 등의 단어입니다. 가까운 미래 사회에서 일고 있는 다양한 변화의 단면들을 들여다보는데 참고할 수 있는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가지 드는 느낌이 있다면 이전에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이제는 ‘대세, 즉 트렌드’가 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컨셉팅’이라는 표현은 ‘마케팅’이라는 단어와 대조해서 소비자 중심의 표현처럼 들리기는 하지만 인터넷 사회에서 부정적으로 사용되는 ‘아바타’로 표현되는 ‘가상 자아’를 오히려 부추기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미디어나 유행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윤리의식 부재가 한국사회의 공허감을 더 크게 만들고 있다는 느낌이 들게 만듭니다.

이제 새해를 앞둔 시점에 미래 사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고 삶과 사역을 준비해나갈 것인지 규정해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이 들어서 앞으로 몇 주 동안은 ‘비전 2019’라는 제하에 말씀을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비전

꿈과 비전: 누구나 꿈이 있습니다. 헛된 몽상도 있고 원대한 가능성을 품은 꿈도 있습니다. 비전은 행동에 가깝습니다. 꿈이 치밀한 계획과 좌절하지 않는 실천을 동반하면 비전이 됩니다.

마틴루터 킹 목사에게도 꿈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이 나라가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것을 자명한 진실로 받아들이고 그 진정한 의미를 신조로 살아가게 되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언젠가는 조지아의 붉은 언덕위에 예전에 노예였던 부모의 자시과 그 노예의 주인이었던 부모의 자식들이 형제애의 식탁에 함께 둘러앉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그는 1963년 워싱턴으로 향한 대대적인 평화행진을 준비하고 실천함으로써 자신의 꿈을 비전으로 만들어냈습니다.

비전과 목표: 비전과 목표를 구분하는 방법은 ‘그 다음에는?’이라는 질문입니다. 목표는 달성하고 나면 끝납니다. 그러나 비전은 미래의 행동을 위한 뚜렷한 방향을 제시하고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도록 도와줍니다. 비전은 인생 전체에 생명력을 가지고 나를 이끌어줍니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 켄 블랜차드는 ‘비전은 자신이 누구이고, 어디로 가고 있으며, 무엇이 그 여정을 인도할지 아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비전으로 가슴을 뛰게 하라>

비전과 사명: 비전은 실천성 있는 방향이며 사명은 미션(Mission), 즉 이룩해야할 과업입니다. 목표는 단기적이지만 미션은 영속적입니다. 소명(Calling)은 사명을 위한 외부적인 부름이고 비전은 사명에 대한 내부적인 동기입니다. 사명은 국가나 인류를 위한 이타성과 공공성을 동반합니다. 사명에는 헌신으로 응답하며 소명에는 순종과 충성으로 응답합니다.

비전 2019: 단기적인 목표를 포함하는 우리의 방향성을 의미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소명이 있고 내부적으로는 그 방향에 대한 비전이 충일하며, 미션을 이룩하기 위한 단기적인 목표를 성취하는 동시에 부르신 부름에 대한 비전을 유지합니다.

  • 고린도전서4:1-2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찌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 빌립보서 3:12-14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방향과 좌표

좌표: 비전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현재 나의 좌표가 분명해야합니다.
진정한 자아와 사회적 자아: 우리 안에는 두 가지 자아가 있습니다.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자아와 사회적 자아입니다. 진정한 자아는 방향을 알려주고 사회적 자아는 지도를 찾아줍니다. 때로는 사회적 자아가 진정한 자아를 억압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가족이 개입할 것이고, 친척, 친구, 다양한 관계가 개입하면서 진정한 자아는 방향을 상실하게 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잊어버린 채 말 잘듣는 바보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허무감 속에 고통하게 됩니다.

한 사람의 인생에 길잡이 역할을 해주는 나만의 진정한 방향과 좌표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자신만의 기준이 없다면 타인을 기준으로 삼게 되고 상대평가로 진행되는 인생은 필연적으로 불행과 불만족을 만나게 됩니다.

오늘 성경은 그 변하지 않는 방향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정해진 방향 제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인생에서 변하지 않는 가치는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진정한 가치 또한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신앙 외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진정한 나의 방향이 되어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 근본적인 인생 방향으로서 하나님을 찾고 분명히 알아야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진정으로 구할 때 찾을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 마태복음 6:7-8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방향 : 오늘 성경 본문 3절은 우리에게 변화하는 사회에서 변치않는 것, 영혼이라는 배의 닻과 같은 것을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1. 믿음의 대상 : 하나님,
  2. 믿음의 기초 : 선을 행함,
  3. 신뢰성 회복 : 성실함
상황 판단과 방향 찾기

오늘 성경 본문 1-2절을 말합니다. “1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2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행악자’라는 말을 적극적인 의미에서 악을 행하거나 타락하는 사람으로 국한하지 말고 ‘악으로 인해 일그러진 죄악의 상황과 환경’으로 바꾸어 생각해봅시다. 그것으로 인해 불평하거나 낙심하거나 비교하여 좌절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베어진 풀처럼 말라질 것이며 의미나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잠시 서론으로 돌아가서 현재 유행하는 신조어들을 생각해봅시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이미 그 속에 들어와 있고 이미 그 안에서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가상 자아’나 가상 공간에 만들어둔 아바타가 더 자신 같습니다. 우리의 세대는 거기에 열광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소위 말하는 ‘컨셉팅’입니다. ‘밀레이엄 가족’에서 엄마는 가족을 위해 요리하는 엄마가 아니라 ‘밥을 잘 사주는 엄마’입니다. TV 프로그램에서 패널로 등장하는 ‘감정대리인’들이 나의 감정을 대신해서 표현해줍니다. 어빙 고프만(Erving Goffman)이 말한 ‘연극적 정체성’을 찾는 세대에서 우리는 이미 ‘대면적 커뮤니케이션’에 익숙하지 않고 인터넷 공간에서의 커뮤니케이션을 편하게 생각합니다.

어떤 소프트웨어 회사가 진행했던 믿음(Believe) 프로젝트 ;

  1. 그들은 믿는다.
  2. 우리는 믿는다.
  3. 나는 믿는다.
비전 2019

존 애이브램스의 “가슴 뛰는 회사”라는 노트같은 책이 있습니다. 그는 ‘미래 스케치 모임’의 내용을 인용하면서 우리의 미래는 설계의 문제, 환경의 결과가 아니라 의도의 결과여야만 한다고 말합니다. 의도적인 삶(Intentional life)이란 우연(Chance)에 의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계획(Choice)에 의해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목표를 명확히 하고 가슴을 열고, 마음을 활기차게 가지면, 좌절을 극복하고 미래를 이루어가도록 하나님께서 힘을 주십니다.

  • 벧후 3: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엄마의 사랑을 아는 아이는 자신이 있다.

한 초등학교 선생님의 글입니다. [1학년을 담임했을 때 한 아이가 종종 내게 다가와 자기 자신의 가치를 확인해보려는 듯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선생님, 나는 나쁜 아이지요?” “아니야, 너는 좋은 아이야.” “치, 우리 엄마가 나는 말도 안 듣는 나쁜 아이라는데….” “아니, 넌 청소도 열심히 하고 선생님 심부름도 잘했잖아.” “선생님, 나는 공부도 못하지요?” “아니, 넌 오늘도 산수셈을 잘 풀었잖아. 너는 공부를 참 잘해. 앞으로는 더 잘 할 거고….” “우리 엄마는 날 보고 공부도 못하는 바보라고 하는데….” 이 아이는 성적도 괜찮고 착한 아이였다.
또 한 아이가 있었는데, 이 아이야말로 내가 “못한다”라고 해주고 싶은 아이였다. 10점짜리 국어 시험지와 70점짜리 산수 시험지를 받아 들고 녀석은 벙긋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나는 산수 박사지요?” 그 아이의 부모가 아이에게 그렇게 말해왔던 것이다. 눈치보는 위축보다는 당당함이 귀여워서, “그렇고 말구. 너는 산수 박사야. 이제 국어 박사도 될 거야.” 신이 나서 어깨를 으쓱거리며 제자리로 돌아가는 아이의 뒷모습에서 자신에 대한 존엄한 기대와 커다란 자신감이 꿈틀거렸다. ◆ 글: 오인숙-우촌초등학교 교사]

엄마의 품속에서 아이는 건강하게 자랍니다. 엄마에 대해 지식을 가져서가 아닙니다. 엄마의 사랑을 알고 확신하면서 아이는 건강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지식적으로 안다고 해서 건강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십자가를 경험적으로 알고 감격해야 합니다. 오랫동안의 종교생활이 우리를 성장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대한 간절한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정현종-

나는 가끔 후회한다
그때 그 일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그때 그 사람이
그때 그 물건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더 열심히 파고들고 더 열심히 말을 걸고
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할 걸…….
반벙어리처럼
귀머거리처럼
보내지는 않았는가
우두커니처럼…….
더 열심히 그 순간을
사랑할 것을…….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꽃봉오리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