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0일 주일예배
절제의 내면
베드로후서 1:1-`11
들어가는 말
성경에서 ‘신비 혹은 비밀’로 사용된 ‘뮈스테리온’이라는 말은 전지전능한 창조주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 말씀에 기초합니다. 세속 신비주의는 개인의 주관적이고 영적인 체험에 근거를 둡니다.
기독교는 성경을 통해 계시된 창조신앙을 근본으로 하는 종교이며, 창조는 일종의 초월(超越)입니다. 하나님은 초월자인 동시에 세상에 존재하는 내재자(內在者)이십니다. 내재를 사는 사람들에게 초월은 늘 신비한 영역입니다. 그러므로 내재를 사는 사람들은 늘 초월의 신비를 꿈꾸고 초월 체험을 추구합니다. 여기서 파생된 것이 신비주의인데 거기에는 늘 계시에 근거하지 않는 유사 초월 체험이 혼합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신비로운 것이지만 신비주의는 근본적으로 기독교가 아닙니다. 일부 기독교 분파가 갖고 있는 초월에 대한 동경은 성경 밖의 종교나 영성운동에서 추구하는 미상의 초월자와 가지려는 유사 초월체험과의 경계가 모호합니다. 이것이 정통 기독교가 신비주의를 경계하는 이유입니다.
오늘은 ‘절제의 내면성’을 주제로 말씀을 묵상해보려고 합니다. 성경의 신비로서 말씀(초월)은 실천으로서 절제(내재)의 내면입니다. 절제는 ‘성령의 열매’임을 늘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절제라는 실천으로 구원과 성화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결과로 절제라는 성령의 열매가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맺어지는 것입니다.
1. 절제는 신성의 열매입니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우리가 어떤 그릇이나 용기를 만들게 되면 그 목적에 가장 적절한 형태로 만들게 됩니다. 우리는 예쁜 찻잔을 놓고 전문가의 손에서 훌륭하게 우려낸 차의 풍미를 즐길 것을 기대합니다.
하나님에 대해 이해하려고 할 때 초월과 내재의 개념이 있습니다. 탁자에 놓인 빈 찻잔이 내재라면 주인의 차우리개에 담긴 차가 초월입니다. 찻잔을 보며 훌륭한 차를 기대하지만 차가 채워질 때까지는 빈 잔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담고 살게 되어 있습니다. 경관이 좋은 산에 올라가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입니다. 그 풍광을 사진 찍어 멋진 작품을 프린트하면 멋진 풍광을 담고 있지만 실제는 아닙니다. 조화를 만들어 실제 꽃처럼 보이게 할 수 있지만 그것은 꽃이 아닙니다. 요즘은 가상현실이 인공지능이 주변에 넘칩니다. 가상현실과 인공지능을 아무리 훌륭하게 만든다 해도 그것은 실제가 아닙니다.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로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도록 하셨습니다.” 생명의 근원은 사람에게 있지 않으며, 사람의 소유도 아닙니다. 경건은 그리스도처럼 사는 것을 의미하는데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내주하시면 가능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절제는 성령의 열매인 것입니다.
2. 두 가지 절제
칼빈은 ‘내적 소명’에 대해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부르시는 것을 소명이라고 하는 데 거기에는 ‘외적 소명’과 ‘내적 소명’이 있습니다. ‘외적 소명’은 복음 전도자의 설교나 다양한 환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죄인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내적 소명’은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그 ‘부르심’은 듣게 하시고 마음에 변화를 일으켜서 그 부르심에 응답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내적 소명’은 칼빈이 개혁주의 신학을 형성하는 단계에서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 칼빈신학의 골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어’ 신지식을 갖게 되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께서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금욕과 고행으로 얻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알리셔야 가능합니다. 신지식의 출발은 거기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을 알기 위한 모든 인본주의적 시도들은 모두 부정됩니다.
경건과 절제는 열매이지 씨가 아닙니다. 결과이지 시작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마태복음 7:15-27의 산상보훈의 내용은 이것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분별하는 기준은 열매입니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나무는 스스로 노력해서 자신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열매는 나무의 본성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입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였습니다. ” 주님은 그들에게 불법을 행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다음에 주님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고 …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다.” 우리는 종종 이 말씀의 중심을 ‘행함’에 두는 오류를 범합니다. 불법을 행하는 사람들의 ‘행함’을 주목하십시오. 그들이 ‘행함’이 없었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의 문제는 말씀이 없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행함’은 불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해야’ 합니다.
기독교는 계시종교입니다. 하나님의 자신을 드러내시는 일, 즉 계시로부터 모든 일은 시작됩니다. ‘외적 계시’가 있어야 하고 ‘내적 계시’가 있어야 합니다. 그 이후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말씀에 응답할 수 있습니다.
(마 7:15-27)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16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20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24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의 행함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있고(계시), 또한 듣게 하신 말씀이 있다면(성령) 행함은 자연스럽습니다. 나무가 열매를 맺는 것이 자연스럽듯이 나무가 그 종자대로 열매를 맺는 것이 자연스럽듯이 ‘말씀을 들은 자’의 행함은 자연스럽습니다.
경건한 사람의 절제는 신념과 의지를 가지고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닙니다. 초식동물들이 고기 먹는 것을 절제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초식동물들은 자연스럽게 고기를 먹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초식동물이 고기를 먹으면 심각한 병이 생깁니다.
완전한 절제는 그것 자체에 관심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면 절제해야 하는 항목들이 자연스럽게 하나 둘 자기 삶의 관심 밖으로 사라집니다.
그리스도인은 절제를 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절제하게 됩니다. 우리의 지식과 관심이 하나님께로 옮겨 갔기 때문입니다. 잠시 향락을 찾아 갈 수 도 있겠지만 근원적인 허무를 발견하고 이내 돌아옵니다. 성령의 사람은 육의 관심을 떠나게 됩니다.
3. 절제는 사랑으로 풍성해집니다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십시오. 나는 당신들이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기에는 패턴이 있습니다. 전자에 후자가 더해지면서 풍성해집니다. 흡족해지고(8절) 넉넉해집니다(11절). 의미가 확장되고 존재가 풍성해집니다. 주님께서도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라 말씀하셨습니다.
절제의 내면을 들여다 보십시오. 거기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사랑이 있습니다. 절제는 금욕과 고행으로 이루는 노력의 산물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총의 열매입니다. 신명기 30장 말씀대로 하나님의 계명은 ‘먼 것도 아니고 지키기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 것은 ‘무언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고의 편협함에 빠져 있습니다. 그러면 어김없이 신앙의 번아웃이 찾아오고 영적 침체를 경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