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사람의 절제

11월 3일 주일예배

거룩한 사람의 절제

로마서 1:16-32, 고린도전서 9:24-27

들어가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에서 마지막으로 ‘절제’를 주제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절제를 논하려고 하면 늘 종교적 금욕과 고행이 먼저 떠올라, 부담스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이유는 ‘경건과 절제’라는 명제 앞에서 늘 우리는 자신이 없고 주눅이 들기 때문 아닐까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믿고 거듭나는 순간, ‘하나님의 거룩케 하심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닮아 살아가는 삶의 씨앗을 성령께서 이미 우리 안에 은혜로 주셨습니다. 그런 면에서 ‘절제’란 불가능한 어떤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은혜로 ‘거룩함을 얻은 성도’로서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인 거지요. 비록 우리가 죄의 영향 가운데 때로 실패를 경험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거룩한 사람’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현대인들의 노동환경 문제에 대해 연구했던 바우어 교수는 그의 연구를 통해 현대 노동자들이 겪는 스트레스에 대해 다양한 관점으로 설명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회적으로 고위층일수록 번아웃 증상이 많고 상대적으로 낮은 임금의 노동자들은 우울증이 많다고 평가했습니다.
스트레스의 유형은 많지만 통근시간의 경우를 예를 든다면, 독일에서는 35%가 ‘장시간 근무와 장거리 통근’에 부담을 느낀다고 합니다. 미국의 경우는 이 보다 심한데, 한 보험회사의 조사에 따르면 실제로 심장과 순환계 질병으로 이어집니다. 저소득 임금 노동자일수록 출퇴근 시간은 길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많은 경우 직장에서 겪는 심신의 스트레스에 비하면 출퇴근 시간은 오히려 쉬는 시간이라고 할 정도입니다.
직장생활이 힘들지만 집에 돌아와 사랑하는 아내와 남편이 기다려주고 위로해준다면, 천진난만한 자녀들과 잠깐만이라도 기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아마도 많은 위로와 격려가 되겠지요. 직장이 있어서 일하러 갈 때에는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일할 수 있으니 감사하겠지요. 돌아올 때에는 가족들을 만나는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반대로 그저 먹고 살기위해 어쩔 수 없이 일한다고 하면 힘들 수도 있고, 퇴근 후 집에 돌아와도 반겨줄 사람이 없다면 우울해지기도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절제를 설명하려고 서론이 길어졌습니다. 아무리 긴 시간이라도 사랑하는 사람, 가족을 만나러 가는 길이라면 지루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 이치에서 ‘절제’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절제는 하나님을 추구함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일이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절제를 통한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은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신30:11)
(신 30:11-14)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12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이 아니요 13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도 아니라 14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오늘은 그리스도인의 절제가 금욕과 고행을 통한 수련을 강조하는 종교적 수행이 아니라면 그리스도인의 영적 삶에서 절제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보겠습니다.

 

1. 자유인가 타락인가

지난 10월17일 마음 답답한 기사 하나를 읽었습니다. 한국의 23살 청년이 사용자 은폐가 가능한 다크웹에 소아성애자 음란사이트를 열었고 국제적 회원 가입을 받아 운영을 했습니다. 최근에 영국에서 소아성범죄자를 검거하면서 이 사이트가 경찰 조사망에 걸렸고 전세계 32개국 경찰의 공조로 310이 검거되었는데 그 중에 223명이 한국인이었다고 합니다. 거기에 더 답답한 일은 미국이나 영국에서는 그런 사이트에서 파일을 다운받는 행위만 해도 10년이상의 실형을 받는데 한국은 그 배포자에게 1심은 집행유예 2심은 1년6개월 실형을 언도하고 그것도 감형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 정도면 한국의 윤리의식와 범죄에 대한 국민적 정서가 어느 정도인지 가히 짐작을 할 수도 있겠습니다. 범죄에 중독을 넘어 무디어진 것일까요?
우선 성경이 말하고 있는 사람들의 본성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로마서 1장 24절부터 32절이 그 모습을 자세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24, 26, 28절에 반복되고 있는 단어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어 버려 두셨다’는 내용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그 마음에 두기를 싫어할 때, 하나님은 그 상실한 마음의 정욕대로 내어 버려 두십니다. 이 ‘내어 버려 두심’이 하나님의 심판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을 그들 속에 보이셨습니다(19절).’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하지 아니하고, 감사하지도 않고, 그 결과 인간의 생각은 허망하여지고, 그 마음이 어두워졌으며, 스스로 지혜있다고 하지만 어리석게 되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죄악이 동성연애를 포함하는 모든 성적 타락이며, 29-32에 열거되고 있는 ‘사형에 해당하는 죄악’들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떠나 사람들이 추구하는 자유이며 인권일까요? 그 타락의 끝에서 만나는 ‘인간의 비인간화’에 대한 책임은 누가 져야 할까요?

2. 두 가지 절제

절제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일반적인 절제, 예를 들어 경기 선수의 절제나 자기 수련을 위한 종교적 절제, 즉 인위적인 것입니다. 둘째, 성경적인 절제는 절제의 목적과 방법이 성경에 근거하고 있을 때 이타적이며 인위적이지 않습니다.
오늘 성경을 통해 사도는 운동선수의 절제를 예로 듭니다. 세상의 절제와 경건한 절제가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운동선수와 같이 절제한다고 말합니다. 다른 점은, 우리의 목표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29절)” 이를 위해 그는,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한다(27절)”고 말합니다.
세상의 절제와 성경적 절제는 비슷한 점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적 절제는 금욕 고행 자체에 의미를 두고 있는 금욕주의나 고행주의가 아닙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목적과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과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서 기쁨과 믿음으로 말미암는 절제이어야 합니다.
세상의 절제와 경건한 절제의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세상적 절제는 ‘자신의 깨달음’과 ‘득도’에 관심이 있습니다. 스스로의 능력으로 이루었을 때 구도자들은 안심을 느낍니다. 자신이 이루었음에 대해 성취감도 갖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절제는 ‘내 안에 그리스도를 이룸’에 있습니다. 그 힘도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을 힘입는 것’입니다.
자율 구원에 대한 고집은 결국 하나님을 거부하고자하는 인간의 죄된 본성이며 하나님에 대한 적극적인 반역은 방탕과 타락으로 이어집니다. 그러한 행위를 적극적으로 범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그렇게 행하는 자들을 ‘옳다’고 인정해주고 타락의 근거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계 종교 현상이기도 합니다.

3. 그리스도인의 절제

그리스도인의 절제의 근거는 믿음과 거듭남에 있습니다. 올바른 절제는 믿음, 중생, 성령안에서만 가능합니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고전6:11)
그리스도인의 절제는 그리스도인의 성경적인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보통 말하는 ‘성화’라는 단어의 뜻에 대해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간혹 우리가 예수를 믿어 의롭다 함을 얻은 이후에 ‘거룩하게 되어지는’ 성화의 단계를 시작하는 것으로 오해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이 단번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이루어가는 어떤 것’이 아직 남아 있는 듯 이해할 때가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함을 얻는 것은 예수님의 구원에 포함되어 있다고 이해한 것이 초대 교부들의 이해였습니다. 이레니우스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은 …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려는 목적을 위해 사람의 아들이 되셨다’고 말했습니다. 아타나시우스 또한 유사한 방식으로 ‘그분은 우리로 하나님이 되게 하시려고 사람이 되셨다’고 말했는데, 그 뜻은 우리가 하나님이 된다는 말이 아니라 ‘생명과 본성’에서 본래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신다는 뜻이며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벧후1:4).
(벧후 1:3-10)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5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8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9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 10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다시 말해서, 신자가 거룩하게 되는 것은 ‘신자의 삶과 도덕에 따라 하나님의 구원이 완성될 수도 실패할 수도 있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구원에 신자의 ‘성화’는 이미 포함되어 있으며 성령께서 이를 적용하시는 것입니다.
신자일지라도 언제나 ‘절제’와 ‘성화’에서 성공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거룩케 하시는 사역’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인의 절제’ 자체 보다는 ‘그리스도인의 절제를 통한 복음전파’가 더 효과적이라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늘 ‘우리는 무익한 종’임을 천명하면서 겸손한 모습을 유지함이 좋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율법생활이 쉽습니다. 그 거룩성을 우리에게 이미 두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법은 먼 것도 아니요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신30). 예수님을 사랑하면 신앙생활이 쉽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14:15)
어떤 아이가 자기 만한 아이를 업고 힘들에 다닙니다. “힘들지 않니?” 라고 물었더니 “동생인 걸이요 뭐!”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동생을 사랑하니까 동생을 업고 다녀도 힘들지 않습니다.
자식을 앉혀 놓고 ‘내가 너를 위하여 얼마나 고생하는 줄 아니? 너에게 얼마나 돈이 들어가는 지 아니?’ 이런 이야기하는 이는 틀림없이 계모라는 것입니다. 친모는 자식을 위하여 희생하고도 힘든 줄 모릅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괴테는 25살에 ‘젊은 베르데르의 슬픔’이라는 소설을 썼습니다. 83세에 ‘파우스트’란 걸작을 내놓았습니다. 58년동안 늘 글을 썼습니다. 지루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너무 즐겁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글쓰기를 사랑하니까 58년간 글을 쓰면서도 즐겁습니다.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면 신앙생활이 즐거운 법입니다.
야곱은 라헬을 너무나 사랑하였습니다. 그런데 장인될 라반이 7년간 봉사하면 결혼시켜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야곱은 7년동안 일을 열심히 하였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라헬을 사랑학 결혼하고 싶어서 죽을 둥 살 둥 일하였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를 연애하는 까닭에 7년을 수일같이 여겼더라’(창29;20). 사랑하면 쉽습니다.

절제에 대한 그리스도인적 관점의 근본은 그것이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갈라디아서 5:22). 어떻게 우리는 우리의 치명적인 욕망에 대항하여 싸웁니까? 바울은 대답하길: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agonizomenos)” (골로새서 1:29). 그는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수고합니다.” 마찬가지로 그는 우리에게 말하길,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로마서 8:13).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스가랴 4:6).그렇습니다. 우리의 힘으로가 아닙니다.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 (잠언 21:31).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마음’으로 오직 ‘하나님을 힘입어’ 기쁘고 충만한 절제의 삶에서 승리하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