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유한 부르심

10월 27일 주일예배

온유한 부르심

마태복음 11:1-12, 28-30

들어가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본문의 말씀은 인생의 많은 짐을 지고 고통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에게 많은 위로와 격려를 주는 성경의 내용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 교우들과 함께 이 말씀을 좀 더 심층 깊게 들여다 보고자 합니다. 거기에는 우리의 삶에 주는 위로와 격려 뿐만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신앙의 지혜와 진리가 담겨있으므로 그것을 간과하지 않고 싶은 마음 때문입니다.
온유라는 성품은 폭력적인 세상에서 상대적으로 매우 약한 모습입니다. 간혹 ‘온유’와 ‘비폭력’이 역사 속에서 어떤 성취를 이룬 기록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온유’는 세상의 권력이 폭력을 휘두를 때 힘이 없어 보입니다. 그렇지만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의 초대의 음성은 그다지 약해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강한 힘과 확신이 우리를 압도함을 느낍니다.
오늘은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께서 부르시는 초청에는 어떤 약속이 담겨 있는지 살펴보면서 우리 모두에게 힘이 되기를 바랍니다.

 

1.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하나님께서 주시는 쉼은 하나님의 안식입니다. 하나님의 안식은 단순한 휴식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육일창조를 마치시고 제칠일에 안식하셨다는 의미는 ‘완성’의 뜻을 갖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창조를 마치고 피곤하셔서 쉰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안식의 의미는 하나님의 완성으로부터 오는 평안이며, 사람은 그 평안 가운데 쉼을 갖고 회복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완성과 완벽한 균형가운데 오는 평강과 휴식에 노동의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안식의 의미 안에서 노동은 휴식(여가)와 분리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노동과 여가의 의미는 안식에 포함된다는 해석이 더 가까운 견해입니다. 그 균형이 깨졌을 때 인간 노동의 질이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죄를 범한 후 아담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그것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창 3:17-19)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완전한 하나님의 완성 가운데의 노동은 ‘먹을 것을 위한 노동’이 아니라 노동이 행복이고 의미가 되는 일이었지만, 죄가 들어온 이후 ‘먹을 것을 위해’ 인간은 일을 해게 되었습니다. 극한 경쟁과 장애를 극복하고, 자신과 가족을 보호하며 살아야 하는데, 혼자서 할 수 없으니 집단이 필요하게 되지만, 집단에 의해 생긴 권력으로부터 압제와 착취를 경험합니다. 그리고는 세상의 구조와 제도 속에서 끝도 모르고 멈출 수도 없는 거듭되는 질주를 계속하다가 거기서 번아웃 되어갑니다. 이것이 ‘노동하는 생활인’으로서 우리의 모습입니다.
게르첸의 어록에 우리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우리가 버린 세계의 벽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공포가 우리를 사로잡고 있다. 공허하고, 확대된 자유… 가는 방향도 모르고 우리가 어떻게 갈 수 있는지, 가서 무엇을 얻을지도 모르고 멈추는 방법도 모른다… 미래는 바다보다 끔찍하고 거기에는 아무 것도 없다… 과연 우리는 현대의 문명, 생활양식, 지금까지 이루어 낸 모든 성과들을 상실할 각오가 있을까? …”

 

2.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오늘의 본문 내용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맥락과 배경을 잘 이해하시면 도움이 됩니다. 오늘 본문이 담겨있는 마태복음 11장은 예수님의 복음 사역으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1절). 6절에 ‘…자가 복이 있도다’하는 표현은 마태복음 5장의 팔복과 같은 패턴을 보여주고 있고, 그 회중들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데, 그 내용은 누가복음 4장의 예수님의 사역 초기 설교와 비슷한 내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에 주목해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11절에 세례 요한이라는 인물에 대한 주님의 평가입니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이보다 더한 칭찬이 있을까요? 세례 요한의 경건과 삶에 주님은 최고의 인정을 하십니다. 그리고 그 뒤에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라는 약속을 남기십니다. 하나님의 가치 평가의 기준이 신앙인의 삶과 경건에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12절에서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참고로 뉴킹제임스 성경을 그대로 소개합니다. “The kingdom of heaven suffers violence, and the violent take it by force.” 이것을 그대로 번역하자면, 하나님 나라는 폭력을 당하고 그 폭력적인 사람들이 힘으로 그것을 취한다는 내용이 됩니다(여기서 폭력은 ‘악한 폭력’이 아니고 상징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누가복음 16:16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킹제임스 성경은 ‘the gospel of the kingdom of God has been preached, and everyone is forcing his way into it”, 사람들은 그 폭력의 힘으로 천국에 들어갑니다.
‘천국으로 들어가는 폭력’이란 도대체 무슨 힘일까요? 하나님의 나라를 부술 수 있는 힘이란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창3:24). 그것은 하나님의 허락입니다. 은혜로 주어지는 놀라우신 허락입니다. 적진을 향해 돌진하는 군사는 오직 목표에 집중합니다. 죽기아니면 살기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돌진하는 사람들의 ‘폭력’, 그것은 ‘사랑의 힘’의 상징적 표현입니다. 마치 강한 군대에 힘없이 무너지는 작은 성처럼 천국은 그들을 기다려 영접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천국을 향해 돌진하는 사람들에게 천국은 반드시 그리고 언제나 열려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방법, 즉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세상의 폭력으로는 천국 침략은 절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경건의 능력은 천국을 침략하듯 들어갈 것이며 천국은 거기에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그 힘은 세상의 모든 폭력보다 강한 것이라고 주님은 평가하십니다.

 
3.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

예수님의 초대에 담긴 신비한 특징은 두 가치관의 충돌과 긴장입니다. 구약에서 예수님은 고난받는 종이며(사53:1-11), 겸손한 메시아(사42:1-3)입니다. 그는 왕이지만 온유한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접근합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로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임을 생각해볼 때, 예수님의 온유는 구약의 성취와 관련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온유와 멍에는 ‘옛적에 제시한 하나님의 길’ ‘선한 길’ ‘진리의 길’을 가는 데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초대의 목적은 ‘단순히 멍에와 인생의 짐을 제거해주는 일’ 이 아니라 ‘진리의 길’을 가는데 필요한 멍에를 가볍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쉽을 얻으리니…’ 주님께서는 멍에를 벗겨주겠다고 약속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삶과 노동과 안식을 주님께 배우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인생의 짐을 지는 주님의 방법’입니다. 마태복음 5장의 회중은 ‘온유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주님은 몇가지 원칙을 제시하십니다.

(히 2:17-18)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18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히 4:14-16)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