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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례의 신비

11월 17일 주일예배

성례의 신비

고린도전서 11:23-26

들어가는

성례란 교회에서 시행하는 예식이며 이는 세례와 성찬 두 가지입니다. 세례는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고 신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 회중 앞에서 신앙을 고백하고 지역교회의 일원이 되는 예식이며, 세례와 입교 그리고 유아세례가 여기에 포함됩니다. 성찬은 주님의 명령에 따라 주의 죽으심을 기념하면서 성만찬을 시행함으로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 까지 전하는 의미를 갖고 모든 교우들이 함께 모여 떡과 잔을 나누는 예식입니다.
오늘은 두 예식을 포함하는 기독교의 성례가 가지는 의미와 각 예식들이 가지는 기본적인 뜻들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기초하여 살펴봅니다.

 

1. 성례의 의미

성례에 대해 논할 때, 가장 기본적인 질문은 ‘오늘날 성례가 과연 실행가치가 있는 것인가’하는 것입니다. ‘성례전의 효력은 무엇인가’하는 질문입니다.
성례전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가지 다른 견해들을 비교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는 로마 천주교회에서 따르는 화체설, 둘째는 재세례파가 갖고 있는 종교적 개인주의, 그리고 칼빈과 같이 종교개혁의 선상에 있었던 루터의 실재론, 쯔빙글리의 상징설 등을 비교해보고 개혁교회가 유지하고 있는 칼빈의 성례론의 의미를 확인해보겠습니다.

성례에 관한 객관주의와 주관주의
로마 천주교회는, 성례전은 시행하는 행위 자체에 의하여 자동적으로 효력을 발생하는 ‘마술적 능력’을 따릅니다(화체설). 성례전의 정당성과 효력은 시행하는 자나 받는 자의 믿음 여부에 관계없이 베푸는 행위 자체에 의해 생겨난다고 봅니다(객관주의). 그들에게 은혜는 성례전이 베풀어짐으로써 자동적으로 임하므로 믿음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례전을 받음으로 인간은 구원에 이르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객관주의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는 외적인 요소에 묶여 있는 셈입니다.
반면에, 재세례파의 종교적 개인주의는 개인의 믿음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의 말씀을 감각적인 요소와 연합시킬 수 없으며, 개인의 믿음이 배제된 유아세례는 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합니다(주관주의). 그들에게 성례전의 정당성과 효력은 받는 자의 믿음과 시행하는 자의 의도와 공로에 의존합니다.
칼빈은 위의 객관주의와 주관주의를 둘 다 배격합니다. 신자의 믿음은 성령으로 말미암으며, 성례전의 표적 또한 성령의 사역을 떠나서는 아무런 능력도 없습니다. 성례전은 도구이며 성령은 성례전에 속박되지 않고 자유롭게 사역하십니다.
재세례파의 주관주의에 대해서는, 은혜는 선물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성례전을 받아들인다는 사실 조차도 성례전이 효력을 발생하는 어떤 조건이나 공로가 될 수 없습니다. 성례전의 표적은 인간으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칼빈에 있어서 성례의 효력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 예정 안에서 성령으로부터 옵니다. 그것은 자동적인 것도 아니며, 인간의 역할로부터 말미암은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은혜로 선택 예정하진 자들의 마음을 열어 믿음으로 받게 하실 때에만 그 효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성례전에 대한 생각은 종교개혁자들 간에도 약간씩 차이가 있었으며 이를 비교해는 것도 유익합니다. 루터는 로마 천주교의 화체설을 반대하면서 ‘실재 임재설’을 주장합니다. 성찬이 시행될 때 성령께서 임재하신다는 주장입니다. 이것은 성령의 사역이 성만찬에 종속하게 되는 논리적인 결과를 가져오므로 칼빈은 반대합니다.
쯔빙글리는 성만찬은 단순한 상징일 뿐이라는 상징설을 주장했는데, 성찬의 의미는 먹고 마심에 있지 않고 영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회상하고 기념하여 구원을 확신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에게 성찬은 상징일 뿐이고 세례도 기념행위일 뿐입니다.
결론적으로 칼빈은 위의 모든 견해들과 다른 입장을 갖습니다. 칼빈은 성령을 말씀, 예전적 표적, 또는 개인적 신앙과 혼동하는 것을 배격하고 그 사이를 구별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는 말씀, 표적, 신앙을 서로 분리시키거나 성령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을 거부하며 연합시키는 입장을 갖습니다.

2. 성례의 신비

어거스틴은 성례를 ‘거룩한 것에 대한 보이는 표적, 또는 보이지 않는 은혜에 대한 보이는 형태로서의 보이는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택자들, 선택받아 구원의 은혜를 입은 성도들이 올바른 성례를 시행할 때 그것은 이 세상의 사건인 동시에 천국의 사건이 됩니다. 성도의 예배와 삶과 경건이 그러하듯 성례는 영적인 사건이며 천국의 사건을 가장 형상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는 말씀이 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7장 참고)

3. 입교의 신비

1) 세례
이제 좀 더 구체적인 한정된 주제로서 두 가지 성례전 중 하나인 서례에 대해 칼빈의 견해를 살펴봅니다.
칼빈은 ‘세례는 그리스도안에 접붙임을 받은 자로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인정함을 받기 위하여, 교회의 공동체안으로 영접되어짐을 시작하는 표적이다’라고 정의합니다. 이 정의는 교회와 세례사이의 밀접한 관계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이차적인 것입니다. 세례는 우리의 신앙을 돕는 것입니다. 세례는 구원에 대한 지식과 확실성을 제공해주시만 그것이 구원의 원인이 되지는 않습니다. 세례의 기능은 원인적(causative)이 아니라 계시적(revelatory)이라는 뜻입니다.
신자에게 올바른 세례는 첫째, 우리를 정결케 함의 증거이며, 둘째,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의 죽음과 새 생명의 거듭남을 증거하며, 세번째, 세례는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증거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8장 참고)

2) 유아세례
세례는 객관적이고 계시적인 측면이 강하지만 주관적인 요소인 믿음 또한 중요합니다.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세례는 결국 유효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으로 응답할 수 없는 유아에게 세례는 어떤 가능한 가치가 있을까요? 거기에는 세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 예정, 언약, 그리고 하나님의 자유라는 세가지 관점입니다.
믿음은 예정 선택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의 신비로운 역사에 의해 어린 아이에게 임합니다. 만일 유아도 하나님의 예정 선택의 은혜에 의해 믿음을 갖는다면, 유아의 세례 또한 가능합니다.
구약에서는 할례로 하나님의 백성임을 확증하였듯이 같은 언약 안에서 신약의 신자들의 자녀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가운데 있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사도행전 16:31,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성년 신자의 경우 세례는 신앙 이후에 주어져야 하며 그는 교회의 구성원이 되기 위하여 세례를 받습니다. 그러나 신자의 자녀들은 이미 교회 안에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 있는 자녀들은 그 부모를 택정하신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 이미 하나님의 교회의 일원이므로 유아세례를 시행함이 마땅합니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74문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