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유의 힘

10월 20일 주일예배

온유의 힘

골로새서 3:1-17

들어가는

온유에 관한 주제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지난 두 주 동안에는 ‘온유’라는 말이 함의하고 있는 뜻에 대해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간단히 말해 ‘온유’란 압제에 의해 눌려 아무런 항의할 힘도 의지도 상실한 상태의 군중들의 일면을 표현하는 말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런 모습은 현대를 살아가는 가치로서 합당하지 않게 느껴집니다. 세상은 언제나 어떤 형태로든 힘을 가진 사람들이 지배하는 듯 보입니다. 약한 사람들은 늘 당하고 사는 것 같이 보입니다. 온유하게 살라고 하는 데 과연 그 ‘온유’라는 성품이 현대의 경쟁사회에서 생존 가능한지, 아니라면 그리스도인들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성공적인 인생을 아예 처음부터 포기해야 하는지 의문들이 자연스럽게 뒤따라옵니다.
성경에서 ‘온유’란 헬라어로 “프라우테스”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우유부단한 성격이나 연약한 이미지를 가진 말은 아닙니다. 온화하고 부드럽고 겸손하고 사려 깊지만 약하지 않습니다.
이 때의 힘이란 강제하는 폭력의 힘이 아닙니다. 내면의 힘이며 영향력으로 드러나는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로 드셨던 누룩이 갖는 변화의 힘이요, 겨자씨와 같은 미래 가능성의 힘이며, 죽어 썩음으로 백배의 결실을 맺는 밀알의 힘입니다. 폭력으로 얻는 권력자가 아니요 섬김으로 얻는 지도자의 힘입니다.
‘온유한 사람’이 땅을 차지할 것이라고 했을 때, 땅은 ‘영역’을 뜻합니다. 영향반경입니다. 리더십을 뜻헙나다. 따라서 ‘땅을 차지할 것이다’라는 선언은 ‘땅에서 사는 사람들과 그들의 마음’을 얻게 된다는 뜻도 함축합니다.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은 자신을 낮추기 때문에 오히려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그들에 의해 높임을 받게 마련입니다.
“온유”는 배울 때(약 1:2 1)나 규율을 세워 잘못을 바로잡을 때 (갈 6: 1) 반드시 지녀야 할 자세입니다. 그것은 또한 반대자를 대할 때 (벧후 2:25)와 그리스도를 증거할 때(벤전3:15)도 지켜야 할 덕목입니다(엑스포지터스).
온유는 ‘통제된 힘’, ‘가장 안정된 상태’ 그리고 ‘자의적 순종’을 표현할 때 사용되는, 수동적인 모습이 아닌 매우 적극적인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온유’라는 단어를 두고 오늘 본문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온유로 옷입음’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림’입니다. 그리고 ‘새 사람의 능력’ 즉 ‘새 사람의 활력, 에너지’가 무엇인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온유라는 단어의 뜻과 함께 본문의 교훈을 생각해보겠습니다.

 

1. 균형잡힌 능력

온유는 “균형 잡힌 능력”을 의미합니다. 넓은 들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던 야생마를 가축으로 사용하려면 잘 길들여야합니다. 단지 길들인다는 뜻이지 힘을 쓰지 못하게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길들인 말은 빠른 속도로 들판을 가로지르는 준마임은 변함이 없습니다. 오히려 필요한 근육이 더욱 강해졌습니다. 아주 강인하고 날렵하게 방향과 속도를 조절하면서 적진을 달릴 때 명장을 더욱 빛나게 만들어 줍니다.
온유함은 힘빠진 상태가 아니라 삼가할 수 있고 자제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훈련을 통해 더 강해져 있습니다.
허약하거나 비굴하지 않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단지 사람들을 사랑하고 화평을 좋아할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사람들은 사람들의 신분이나 처지와 무관하게 그들 앞에서 겸손하게 처신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아무런 거리낌없이 이 세상의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과 더불어 교제합니다.
‘온유’는 강한 마음입니다. 상황을 올바르게 판단하고 정의를 위해 나서야합니다. 폭력에 폭력으로 대항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악한 범죄나 학대를 좌시하거나 간과하는 무력한 마음이 아닙니다.
만일 사람들이 고통가운데 있다면, 온유한 사람은 자신이 도울 일을 찾습니다. 악행이 저질러지고 있다면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할 수 있는 바를 행합니다. 악이 성행하고 사회는 거기에 물들어 있다면 온유한 마음은 ‘의분’을 갖고 행동합니다.
노자에 “상선약수”라는 말이 있습니다(노자8장).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란 뜻입니다. 그리고 물의 세가지 특징을 말하는데, 첫째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합니다. 둘째 물은 다투지 아니합니다. 셋째 물은 늘 낮은 곳으로 흐르며 낮은 곳에 있습니다. 물은 부드럽고 약해 보입니다. 그러나 물로 바위도 뚫고 강철도 자릅니다.
미국을 최근 에너지 최고 강국으로 만든 것은 세일가스입니다. 셰일가스는 지하 2000~3000m에 있는 셰일층을 파쇄해 가스를 채취하기 때문에 수평정시추와 수압파쇄라는 새로운 시추기술이 적용됩니다. 물을 사용하여 3천미터 지하의 셰일층을 파쇄합니다. 초당 600~700m의 속도로 물을 분사해 물체를 자르는 ‘워터젯’은 가랑비 같은 가는 물줄기로 강철을 절단합니다.

 

2. 가장 안정된 상태

‘온유’는 가장 안정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죽어 있어 안정됨이 아니라 생명과 에너지를 가진 상태에서 안정됨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목동이 맹수를 만날 때, 사용하는 물맷돌이 있습니다. 돌을 넣어서 빙빙 돌리다가 적당한 때에 손잡이를 놓으면 돌이 강한 힘으로 날아가 표적을 쓰러뜨립니다. 돌이 날아가 표적을 맞추기 위해서는 가장 좋은 각도와 방향으로 날릴 수 있도록 가장 잘 준비되어 있는 상태가 ‘온유’한 상태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보통 성인의 몸은 체온을 조절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혈액을 돌려서 체온을 조절해주고 더우면 땀을 배출하여 체온을 떨어뜨려줍니다. 아기들은 체온 조절 기능이 없습니다. 아기가 잘 때 뒷목을 만져보고 체온이 오르면 옷을 풀어주고 추우면 덮어주어 외부적으로 체온 조절을 해주어야 합니다. 체온이 가장 잘 조절되어 아기가 편안한 상태가 되었을 대 ‘온유한 상태’라고 말합니다.
우주의 가장 큰 신비 중 하나는 그 장구한 세월동안 지구가 보존되어 왔다는 사실일 겁니다. 지구는 그 궤도가 조금만 벗어나도, 자전 속도가 조금만 차이가 있어도 생명이 보전될 수 없는 환경이 됩니다. 만약에 중력의 균형이 조금이라도 변화가 생겨서 지구가 궤도를 이탈하거나 수억개의 항성 행성 중에서 어느 하나라도 지구까지 날아와 충돌하게 되면 지구 상의 모든 생물은 한 순간에 종말을 맞게 될 겁니다.
우리가 얼마나 빨리 움직이고 있는지 계산해보았습니다. 자전속도를 보면, 적도 부근에서 지구의 원주는 대략 40,070km이라고 합니다. 하루의 길이를 24시간이라고 가정하고, 원주를 하루 길이로 나눠봅시다. 시간당 1,670km/h 서울과 부산을 11분만에 주파하는 속도입니다. 공전속도는 어떨까요? 일년동안 지구는 태양주위를 9억4천만km를 여행하는 데 이는 마하2 음속2배의 제트기보다 44배가 빠른 속도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 위에서 밤에는 자고 낮에는 창밖의 한가한 풍경을 즐기고 있습니다. 힘 중에 가장 약한 힘이라고하는 중력의 힘으로 태양이 지구를 잡고 있지 않으면 지구는 한 순간에 소멸해버립니다. 지구가 그 속도로 자전하지 않으면 자장이 형성되지 않고 태양풍을 직접 받으면 지구의 생명체는 순식간에 없어져 버릴 것입니다.
속도와 힘이 완벽하게 이루어진 우주 속에서 우리는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균형이 없으면 죽어버립니다. 그렇게 가장 완벽하게 안정된 상태가 ‘온유한 상태’라고 말합니다.

 
3. 자의적 순종

성경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을 표현할 때, 종종 ‘그리스도의 군사’라고 칭했습니다. 군사가 갖고 있는 특별한 뜻 때문입니다. 군사는 두 가지 중요한 선행조건을 갖고 있습니다. 명령에 대한 절대 복종과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청년들은 육체적인 힘이 있지만 전투를 수행하기에 준비가 필요합니다. 훈련을 해야 합니다. 군사는 태어나지 않습니다. 양육과 훈련으로 만들어집니다. 주어진 명령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지 않는다면 오합지졸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한 명령이 주어지면 책임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훈련없이 전쟁이 투입되면 성과 없는 죽음을 맞을 뿐입니다.
잘 훈련되어 능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상부의 지휘체계에 잘 복종할 수 있도록 정신무장이 잘 되어있는 군사가 작전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사람으로, ‘온유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온유는 강한 자제력을 지닙니다. 온유한 사람은 그 마음과 생각을 다스립니다. 그는 자신의 육체의 욕심을 억제하고, 혈기, 복수심, 정욕, 쾌락과 방종에 자신을 내어주지 않습니다. 잠언 기자는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낫다”고 했습니다(잠16:32).
(잠언 16:32)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2. 온유의 힘으로…

온유는 힘을 전제로 합니다. 폭력으로 제압당할 때는 아무런 힘이 없어 보입니다. 세상의 폭력 앞에서 예수님의 응답은 십자가였습니다. 예수님의 정의는 폭력으로 세워지지 않습니다. 사랑을 기초하여 세워지는 하나님의 권력입니다(요19:10-11).
대리적 희생은 자발적 희생으로 완성됩니다. 구약의 동물을 잡아 희생을 드리는 제사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완성됩니다. 진정한 희생은 예수께서 지신 십자가에서 보여준 자발적 자기 희생으로 완성됩니다. 그 차이란 종교적 폭력에 의한 제압이거나 하나님의 권위에 의한 평강이거나 간의 차이입니다(프랭클린). 그 힘은 팩스 로마나, 폭력으로 이루어진 평화가 아니라 샬롬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평화, 그리스도의 평강입니다.
‘약한 것’이 ‘권력’이라는 말씀을 드려야 하는 데 거기에는 생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권력에 대한 이해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폭력이라는 힘에는 정치권력, 경제권력, 정보권력 등, 즉 타인을 압제하는 수단으로 힘이 작용할 때 우리는 ‘폭력’이라 정의합니다. 폭력이라는 구조에서 평안함을 얻기 위해서는 내가 그 힘을 가져야합니다. 이 구조가 우리를 번아웃시키는 사회로 만들었습니다.
은퇴를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런던 경영대학원 교수이자 인재론, 조직론의 세계적 권위자 린다 그래튼(Lynda Gratton) 교수께서 인터뷰한 내용이 ‘초예측’이라는 책에 소개되었습니다.
그분이 ‘100세 인생’이라는 책의 저자인데, 은퇴 후의 자산을 둘로 나눕니다. 유형자산과 무형자산입니다. 앞으로는 주택, 현금, 예금 같은 유형자산보다는 건강, 동료, 변화에의 대응력과 같은 무형자산이 훨씬 중요해진다고 합니다. 그 무형자산은 세 가지인데 변형자산, 생산자산, 활력자산입니다.
앞으로 미래에 우리의 안전과 삶을 지켜줄 보증은 어디에 있을까요? 폭력적인 세상에서는 폭력을 소유하는 것이 보증이 될 수도 있겠지요. 그렇지만 유형자산, 즉 재물과 권력이 보증이 되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을 때 우리의 보증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입니다.
미래에 완벽한 의료체계가 완성되고 모든 국민들에게 기본생활비를 지급하는 복지국가가 완성될 때, 각종 로봇과 인공지능이 노동을 대신하고 사람들에게 여가가 충분히 찾아오고 더 이상 우리를 번아웃시키는 경쟁이 약해질 때 우리의 삶의 행복과 의미는 어디에 있을까요?
그 해답은 교회 공동체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갖고 있는 온유의 힘, 오늘 본문은 그렇게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강한 힘이 있습니다. 폭력이 아닙니다. 위엣 것을 찾는 사람들, 그리스도인들로부터 흘러나오는 그리스도의 평강의 힘, 하나님의 샬롬의 힘, 그것이 세상을 살리는 희망이며, 진정한 의미의 능력입니다. 주님은 그것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라고 표현합니다.
(골 3:15-17)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