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 속에서의 자유

1월 27일 주일예배

시편 23:1-6

들어가는 말

유명한 기독교 사상가 C.S 루이스는 아내와의 사별 후 기록한 책 ‘헤아려본 슬픔’에서 슬픈 감정에 대해 자신의 경험을 비추어 기록했습니다.

“슬픔은 두려움과 같은 느낌인데, 무섭지는 않지만 감정은 비슷합니다. 속이 울렁거리고 안절부절 못하며, 입이 벌어지고 연신 침을 삼킵니다. 뇌진탕이 일어난 것 같은 느낌에 세상과 나 사이에는 장막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만사가 재미없고 나를 가만 내버려 두면 좋겠습니다. 그럴듯하게 꾸며보지만 갑자기 먹먹한 기억이 덮쳐오면 순간 눈물과 비애에 빠져듭니다…”

동물은 고통은 당하지만 고난을 당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고난에는 의미가 수반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고통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와 의미부여에 따라 고난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고통없이 살수 없고 죽음의 마침표로 끝을 맺습니다.

오늘은 그리스도인의 자유 중에서 윤리적인 측면, 즉 살아가는 중에 마음에 간직해야 할 자유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고난은 선택적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고행주의와는 구분해야합니다.

  • (골 1: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1. 유익으로서의 고난

고난이 유익하다 할 수 있을까요.  성경은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편119:71)고 말씀합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편 119:67).”

고통이 선물이 될 수 있다는 성경의 개념은 어떻게 하든 아픔을 피해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의 마음가짐과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폴 브랜드 박사는 마비경보 시스템을 발견해서 한센병이나 당뇨병등 마비를 일으키는 질병을 치료하는 방식에 일대 혁신을 가져왔습니다. 그는 인도에서 한센병동 환자들을 치료하던 경험을 말합니다. 한센병 환자들은 감각이 마비되어 통증을 모릅니다. 밤에 쥐가 들어와 손가락을 뜯어 먹고 허벅지를 파먹어도 알지 못하고 잠을 잡니다. 때로는 펄펄 끓는 물속에 손을 넣어 감자를 꺼냅니다. 통증을 깨닫지 못할 뿐 손발이 썩고 온몸에 상처가 나서 아물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개발한 것이 통증을 느끼게 해주는 기계를 발명했습니다. 통증으로 위험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그는 “고통을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고 증거합니다.

고통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인생의 목적이 쾌락, 탐닉, 재산, 안락과 명예만 있다면 삶은 얼마나 공허하냐고 목소리 높여 부르짖습니다. 고통이 메가폰을 사용해서 안락에 취해 있는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 목청을 높입니다. 그러나 마비된 신경은 경고의 음성을 듣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루이스는 고통은 ‘하나님의 메가폰’이라고 말했습니다.

2. 영광을 위한 고난

죄에 물든 세상에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시는 일은 십자가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하나님께 완전한 순종을 드림에서 극치를 이룹니다. 십자가는 사탄의 아이디어도 아니고, 빌라도와 백성들이 범한 우발적인 사고도 아닙니다.

인류의 구원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하는 구원의 문이요 진리의 길이었습니다(마16:21, 눅9:51). 고난을 받고 죽음을 당하는 것이 예수님의 결정이었고 반드시 이루어야 할 사명이었습니다.

  • (마 16: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 (눅 9:51)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3. 죽음으로부터의 자유

다윗은 목자였습니다. 그는 시편23편의 내용이 어떤 것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4절)” 목자가 없다면 양들은 음침한 골짜기에서 무력합니다. 그러나 목자가 있는 한 양들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고난이라는 말을 두고 성경은 어디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은 더 쉽고, 더 안전하며, 더 완벽하게 멸균 처리된 삶을 살게 될 거라고 약속하지 않습니다(필립 얀시).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없애 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위로는 거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죽음이라도 두렵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반드시 지나셔서 광명한 천국으로 이르는 길을 이루셨듯이, 우리가 죽음의 문턱을 넘을 때 반드시 함께 하십니다.

‘생로병사’, 사람이 태어나고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은 정한 이치입니다. 부귀영화 불로장생이 정말 복일까요. 회사를 잘 경영하고 싶으면 경영을 공부해야 하고, 자연의 이치를 배우고 싶으면 과학을 공부해야 하고, 병을 고치고 싶으면 의학을 공부하듯, 구원과 진리, 죽음과 영생을 알고 싶으면 신앙을 가져야합니다. 저는 목사가 되어 때로 귀한 경험을 합니다. 연락을 받고 병원 중환자실을 찾으면 임종을 앞둔 성도께서 침대에 누워있고 가족들이 옆에 있습니다.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다 있습니다. 그러나 숨져가는 가족이나 교우를 사랑하는 마음만이 한 가닥 끈이 되어 모두를 하나로 묶고 있을 따름입니다. 너나 할 것없이 모두 그때만은 삶의 마지막 순간과 직면합니다. 그때 난생 처음 목사를 찾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저는 목사가 되어 때로 귀한 경험을 합니다. 연락을 받고 병원 중환자실을 찾으면 임종을 앞둔 성도께서 침대에 누워있고 가족들이 옆에 있습니다.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다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만은 숨져가는 가족이나 교우를 사랑하는 마음만이 한 가닥 끈이 되어 모두를 하나로 묶고 있습니다. 너나 할 것없이 모두 그때만은 삶의 마지막 순간과 직면합니다. 그때 난생 처음 목사를 찾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일생을 사는 동안 고통의 음성, 내면의 목소리, 예수 안에 있는 풍성한 삶의 초청을 외면한 걸까요.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주님과 함께 넘어가 부활을 만나십시오.

 

고난 속으로

“바보새”라는 별명을 가진 알바트로스(Albatross)는 날개를 펼치면 3-4미터가 됩니다. 날개가 너무 커서 뒤뚱거리며 걷고, 날개를 편 채로 곤두박질하거나 넘어지는 경우가 많으며 둔탁하여 보이는 생김새 때문에 바보새라 합니다.

거센 바람이 불기 시작하여 다른 새들이 둥지로 자취를 감출 때, 이 바보새는 절벽위에 우뚝 서서 날개를 피기 시작한다. 신천옹(信天翁), 즉 ‘하늘을 믿는 노인’이라는 별명처럼 이 새는 세찬 바람이 도전하기 시작할 때, 유유히 날개를 펼치고 절벽에서 뛰어내립니다. 넓은 날개를 바람에 맡고 비상하기 시작합니다. 가장 높이 오르는 새, 먹지도 않고 쉬지도 않고 6일 동안이나 공중에 떠있습니다. 고난의 바람이 불 때 이 기상이 가장 고귀해지는 새입니다.

거센 바람이 불기 시작하여 다른 새들이 저마다 둥지로 자취를 감출 때, 이 바보새는 절벽위에 우뚝 서서 날개를 펴기 시작합니다. 신천옹(信天翁), 즉 ‘하늘을 믿는 노인’이라는 별명처럼 이 새는 강한 폭풍이 불어오기 시작할 때, 유유히 날개를 펼치고 절벽에서 뛰어내립니다. 넓은 날개를 바람에 맡기고 비상하기 시작합니다. 가장 높이 오르는 새, 먹지도 않고 쉬지도 않고 6일 동안이나 공중에 떠있습니다. 고난의 바람이 불 때 그 기상이 가장 고귀해지는 새, ‘바보새’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자유는 고통과 고난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고통과 고난속에서의 자유’입니다. 고통과 고난에 얽매여 노예가 되지 말고, 예수께서 다시 돌아오실 때 모든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난다는 확신 속에서 쉬는 자유입니다.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을 이미 받았으므로 내 삶이 죽어도 좋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생명이 되시니 나는 얼마든지 죽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절대로 잃을 일이 없으니 내 모든 것을 기꺼이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참 자유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걷는 삶보다 더 자유로운 삶은 없습니다.

  • (시 37:19)여호와께서 온전한 자의 날을 아시나니 그들의 기업은 영원하리로다 그들은 환난 때에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며 기근의 날에도 풍족할 것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