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일 주일예배
자기부인과 성령의 내주
고린도전서 3:1-4
들어가는 말
지난 달에는 그리스도인의 치유에 관한 주제들을 살펴보았는데, 말씀을 전하면서 저는 성도님들께 ‘자기 부인(Self-denial)이라는 주제는 좀 더 자세한 설명과 보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지난 해에는 성령의 열매 아홉 가지를 중심으로 말씀을 나누었었는데 이는 성령과 함께 나타나는 신자들의 삶의 윤리와 성품과 관련한 주제들입니다. 올 해는 성령의 내재와 영적인 삶에 대한 실천들을 살펴보고자 하는데, 성령의 내주하심과 그와 함께 하는 경건의 실천에 있어서 가장 첫 단계의 중요한 것은 ‘자기 부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영적으로 승리할 수 있는 진정한 비밀은 성령의 내주하심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내주하시는 성령께 자신을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께 자신을 드리는 것은 결국 자신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일은 자신의 삶을 성삼위 하나님을 향해 열어 가장 복되고 풍요로운 삶을 살게 합니다. 그것은 슬픈 일이 아니라 가장 고귀한 기쁨을 찾는 일이며, 지존자와 함께 자신을 가장 고귀한 삶으로 이끄는 길이며, 패배를 모르는 승리자가 되게 만들어 주는 일입니다. 앞으로 네 주 동안에 다음의 네 가지 주제를 ‘자기 부인’과 연관하여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1) 자기 부인과 성령의 거하심
2) 전능하신 하나님과 함께
3) 그리스도의 주인 되심
4) 성령충만
자기 부인과 성령의 내주
고린도전서 3:1-4
(고전 3: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고전 3: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고전 3:3)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고전 3:4)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
성경에는 자기 부인과 관련하여 두 가지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제자의 ‘자기 부인’이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9:23의 ‘제자의 자기 부인’은 그리스도인들이 승리의 삶을 살지 못하게 만드는 죄와 타락의 영향들이며 십자가에 못박아야 할 경건하지 않은 성품들이며 자기의, 자기고집, 세상의 욕망들과 관계가 있습니다.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진다’ 함은 그러한 인위적인 신앙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7의 ‘예수님의 자기 비움’은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위해 자기의 특권을 포기하는 일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는 하나님의 교회에 두 부류의 그리스도인이 존재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령한 자’와 ‘육신에 속한 자’입니다. ‘육에 속한 자’는 수년간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지만, 여전히 성장하지 않은 신자들입니다. ‘신령한 자’는 내주하시는 성령께 자기를 내어 맡김으로써 영적으로 사는 신자들입니다.
1.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의 삶
앤드류 머레이는 ‘나를 죽이고 성령을 품어라’는 책에서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다음 네 가지의 경우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첫째, 유아기의 삶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갓 태어난 아기는 아직 말할 주 모르고 걷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아기가 문제가 있다고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정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1년이 지나고 성장하지 않고 3년이 지나도 걷지 못한다면 ‘뭔가 장애가 있을 것이라’고 걱정하게 됩니다. 유아기에는 유아식을 먹지만 장성해서도 유아식을 먹고 있다면 문제가 있습니다.
신자들이 믿는다고는 하지만 진정으로 하늘나라에 속한 삶을 살아가는 영적인 진보가 없다면 우리는 뭔가 결핍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자에게 경건의 아름다움이 없고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문제가 있습니다(히5:12).
“(히 5:12)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두번째는 죄와 영적인 실패가 지속해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서 바울은 지적합니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그들 중에는 목회자, 장로, 교사, 혹은 기도회 인도자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자주 노함과 다툼과 질투를 보입니다. ‘분쟁과 시기는 육체의 일’입니다(갈5:20).
우리는 종종 질문합니다. “왜 내가 20년동안 자아와 싸웠지만 아직도 그것을 다스리지 못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당신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죄악의 성품이 자리한 곳 자아의 뿌리와 싸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그것을 포기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당신의 버리지 못하는 죄성의 뿌리 때문에 성령께서 내주하지 못하시고 우리의 마음을 채우지 못하십니다. 성령의 내주와 함께 오는 죄에 대해 승리하고, 육체의 욕망을 따르지 않을 힘을 덧입지 못합니다.
세번째는 은사와 은혜의 차이점이 존재합니다. 성령의 은사는 신자로 하여금 봉사하게 합니다. 성령의 은혜는 신자로 하여금 자신으로부터 자유하게 합니다. 고린도교회에는 은사가 넘쳤고 봉사와 언변과 지식에 풍족했습니다(고전1:4-5, 12장, 14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육신에 속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을 모으고 많은 일을 하는 것 같지만 성령의 모습이 거의 나타나지 않습니다. 은혜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성령의 열매가 그들의 인격을 통해 나타나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는 그런 모습을 가리켜 이렇게 말씀합니다.
(고전 13:1-3)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네번째는 영적인 진리를 받을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합니다. “내가 신령한 자를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그들은 교회 내에서 많은 은사를 활용하면서 굉장한 일을 하는 것 같으나 영적으로 무지하거나 어리석었습니다. 종종 육체의 본성이 끔찍한 열매를 맺고, 성령의 열매는 마음 속에 자리잡을 틈이 없습니다.
2. 수리인가 개혁인가 (Renovation or Reformation?)
한 화가에게 그림을 부탁하면서 도화지를 내밀었습니다. 아마도 거기에 온통 잡스러운 그림으로 낙서가 되어 있다면 화가는 그 위에 그림을 그릴 수 없을 것입니다. 새집을 지으려면 옛집은 완전히 부수고 잔재물을 치워야 합니다.
새그림을 그리려면 낙서를 모두 지우든가 새 도화지를 내놓아야 합니다. 옛집터에 새집을 지으려면 옛집은 완전히 부수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자기부인은 새그림을 위해 낙서를 지우거나 새집을 위해 옛집을 부수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자기부인은 ‘성령께서 오셔서 내주하심’에 어울리지 않는 모든 것을 버리는 작업입니다. 전문가가 아닌 어설픈 아마추어는 열심히 한다는 것이 오히려 일을 망칠 때가 많습니다. 전문적으로 훈련된 의사가 아닌 돌팔이 의사는 환자의 생명을 오히려 위태롭게 합니다.
신자가 갖고 있는 어설픈 자기 고집으로 성령의 일을 오히려 훼방하는 것이 신자의 삶에는 자주 발생하는 실수입니다. 성령의 거하심과 충만하심과는 어울리지 않으며 뭔가 부족한 자기의(Self-will), 자기과신(Self-confidence), 자기예찬(Self-exaltation)은 성령의 내주하심을 스스로 거부하는 경건하지 않은 마음입니다. 자기부인은 이 모든 것들을 꺼내놓고 버리는 작업입니다.
하나님은 수리(Renovation)하려고 하지 않으십니다. 세상 것들을 혼합하여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려는 것은 바보 같은 일입니다. 하나님은 새 건물(New building)을 위한 완전한 혁신(Reformation)을 원하십니다.
성경의 자기부인은 육적이라고 생각하는 일부를 해체하고 좀 더 멋있어 보이는 영적인 것들을 덕지 덕지 붙여 장식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더 흉칙한 모습을 만들 뿐입니다. 위장된 ‘하나님 나라’에서는 능력이 뿜어 나오지 않습니다.
신자가 뭔가 이루려는 모든 노력을 ‘성경의 자기부인’은 뿌리부터 뽑으려고 합니다. 철저하게 ‘아무 것도 아님’을 발견하고 겸손하게 ‘성령께서 오시도록’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십자가 앞에서 ‘내’가 보탤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무너지고 ‘무익한 종’임을 고백할 때 비로소 천국의 능력은 행진을 하기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