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보좌로

2월 9일 주일예배

은혜의 보좌로

히브리서 4:1-16

들어가는

여행을 하다가 아름다운 곳을 만나 감동하고 장엄한 풍광을 보고 감격합니다. 그러나 며칠 지나면 집에 가고 싶습니다. 우리는 왜 좋은 곳을 찾아 여행을 가서는 얼마 되지 않아 집에 오고 싶어할까요? 사람에게는 누구나 회귀본능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집을 떠나 있으면 고향을 그리워하는 향수병이 생깁니다. 사람에게는 변화를 추구하려는 욕구 이상으로 안정을 찾고 항상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행에는 새로운 경험의 즐거움이 있지만, 가정에는 안정과 휴식이 있습니다. 여행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은 길을 보여주는 이정표가 필요합니다. 여행중 갈림길을 만날 때마다 방향을 보여주는 표시가 있어야 합니다. 그 이정표는 좋은 재료로 보기 좋게 만드는 것도 필요하지만 중요한 것은 바른 방향 표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겠지요. 아무리 잘 제작되었다 해도 방향 표시가 잘 못되어 있는 이정표는 필요가 없습니다. 길표식을 잘 만들기 위해 여행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 바보 같은 일일 겁니다.
오늘 성경은 여행 중에 있는 한 무리의 군중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대로 노예생활을 하던 애굽을 떠나서 광야를 지나 약속의 땅을 향해 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그들의 모습은 구원 받은 백성들이 천국으로 가는 여정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죄악의 속박을 벗어나 천국 여정을 출발했지만 아직은 광야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광야는 천국 백성이 걷고 있는 여행길 같습니다. 여행 길이 즐겁다 해도 집이 안겨 주는 안정의 행복을 대체하지는 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안식은 약속의 땅에서 얻는 것입니다. 광야는 약속의 땅을 향해 가는 여행길입니다. 가나안 땅에 약속된 안식이 있는데 광야에서 영원히 머물려고 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광야는 여행길일 뿐이며 하나님의 안식을 보여주는 이정표 같은 곳입니다. 그 가치는 목적지를 보여주는 것인데, 거기서 영원히 살 것처럼 인생의 모든 열정과 시간을 거기에 쏟으면서 정작 필요한 여행은 하지 않고 있다면 바보 같은 일이겠지요.

 

1.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함

오늘 성경은 신자들에게 ‘두려워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절). 왜냐하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있지만, 그 약속에 이르지 못하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2절은 좀 더 자세히 말씀합니다. ‘복음 전함을 받은 사람들’이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목표로 하는 것이 있다면 방법이 있고 결말이 있습니다. 내가 좋은 친구와 아름다운 풍광을 즐기면서 여행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집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면, 아름다운 풍경이나 여행의 즐거움은 더 이상 행복이 아닙니다. 그저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 뿐 일 겁니다.
우리가 집에서 떠나서 여행을 한다면 돌아갈 집이 분명히 있습니다.
때로 인생의 여행자가 돌아갈 집이 없는 듯 행동할 때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영원한 것이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이 영원합니다(시102:25-27). 둘째, 하나님의 말씀이 영원합니다(막 13:31), 셋째, 인간의 영혼이 영원합니다(살전4:16-17). 하나님의 말씀은 ‘환난받는 너희에게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이라고 말씀합니다(살후1:7-10). 인생 여행자에게 결론은 분명 존재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안식, 즉 우리의 영혼의 고향입니다.
반드시 존재하는 인생 여행의 결론, 하나님의 안식, 영혼의 본향에 이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복음의 유익에 믿음으로 연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은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단지 ‘사람들이 행위가 악하므로 빛으로 나오기를 꺼려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복음이 유익이 되지 못한 것입니다.

 

2. 자기부인과 순종

4절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가 불순종이라고 말씀합니다. 다윗의 말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그리고 11절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려 힘쓰고, 순종하지 않는 본에 빠지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햇빛을 생각해 봅시다. 구름이 있는 날 해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태양이 없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태양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밝게 비추고 있습니다. 만일에 햇빛이 없는 곳이라 어두우면 밝은 곳으로 나오면 됩니다. “혹시라도 해가 없어지면 어쩌지? 왜 해는 밝게 빛나지? 내가 그 빛을 계속 받을 수는 있을까?” 이렇게 걱정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태양의 에너지가 없다면 지구의 모든 생명체는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간혹 하나님에 대해 비슷하게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언제나 필요할 때 마다 나타나지 않으실까? 왜 때로는 아무런 힘도 없는 것처럼 나약하게 보일까? 하나님의 은혜는 있기는 한 것인가?” 반드시 존재한다는 하나님과의 이 깊은 단절감은 무엇입니까?
거기에 대한 대답은 단 한 가지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며, 우리가 하나님을 거부했기 때문이며, 하나님께 ‘자기를 부인하고’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존재와 명령을 몰라서 불순종한 것이 아닙니다. 가인이 하나님을 몰라서 동생을 죽인 것이 아닙니다. 가인은 제사의 결과 때문에 동생을 질투하여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예수님을 배반한 가롯 유다, 대제사장 가야바, 총독 빌라도가 신의 존재를 몰라서 악을 택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나오지 않은 것입니다. 어둠 속에 머무르면서 빛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이 주장하는 ‘자기’입니다.

 

3. 위장된 순종: 자기부인이 없는 헌신

때로는 위장된 헌신에 신자들 스스로 속을 때가 있습니다. 자기부인이 없는 헌신은, 그 열정이 강하면 강할수록 하나님의 안식을 이룸에는 더욱 큰 장애물이 됩니다.
마태복음 16장에는 아주 극명한 대조가 한 사건을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 베드로와의 대화에서 베드로는 아주 유명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하고 칭찬합니다. 그런데 바로 뒤에서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에 대해 말씀하실 때는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예수님을 위해 강한 항변을 내놓습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이 발언 때문에 베드로는 예수님께 오히려 질책을 듣게 되었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그런 후에 다음 절에서 예수님은 자기 부인에 대해 다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논리적으로 볼 때, 예수님을 보호하고자 하는 베드로의 의도가 잘못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부인’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는 문제가 보입니다. 예수님은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사람의 일로 생각하면 예수님을 보호하고 싶은 베드로의 생각이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로 생각한다면 다릅니다. 하나님의 일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만인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방해하는 일은 사탄의 일이 될 수 있으며, 베드로는 지금 자신의 열심으로 십자가의 길을 방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때로는 묻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그토록 애쓰며 노력하고 열심히 기도하며 봉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왜 실패하는 걸까요? 저는 하나님을 믿고 신뢰합니다.” 그 답은 한 가지입니다. ‘자기’가 십자가에 못박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주받은 내 자아, 옛사람을 신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5:44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자신의 십자가의 길을 예견하고 그 길을 걷고 계시는 예수님은 같은 도전을 신자들에게 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은혜의 보좌로
16절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은혜의 보좌 앞에 은혜를 얻기 위하여 나가는 방법은 오직 하나, ‘긍휼하심을 구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상한 심령을 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는 방법은 ‘철저한 자기부인’으로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가 구하는 ‘긍휼하심을 받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안식에는 순종으로 들어간다
그것이 태초에 인간에게 주셨던 방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복을 주시면서 하신 말씀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땅을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최고의 권력과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 목적은 창세기 2:15에서 드러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여기서는 일을 맡아서 관리하는 청지기의 모습이 강조됩니다. 최고의 권력을 가진 가장 자유로운 존재인 인간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최고의 순종을 보임으로 영생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인간의 ‘자기’의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빚어 만드신 인간의 그릇에 하나님은 영생의 복을 담기 원하셨습니다. 사람은 불순종으로 그 그릇에 죄악과 타락을 담았습니다. ‘자기부인’이란 이 모든 것을 비우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일치를 이룰 수 없다는 준엄한 교훈입니다.

우리는 형성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찬송가 가사처럼, 이전에는 우리는 잃어버려졌으나 지금은 되찾아졌습니다. 은혜로 구원을 입은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의 일부가 되었고,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인생 여행이 끝나 하나님의 품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의 일부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