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6일 주일예배
나의 사랑 나의 예수
갈라디아서 2:15-21
들어가는 말
인간과의 경쟁으로 널리 알려진 알파고는 총 4가지 버전이 존재합니다. 2015년 천재 바둑기사 판 후이(Fan Hui)를 이기고 네이처에 실린 알파고 ’Fan’, 2016년 이세돌 9단을 이긴 알파고 ‘리’, 커제 9단과 대결에서 3:0 완승을 거둔 알파고 ‘마스터’ 그리고 2017년 네이처를 통해 공개된 알파고 ‘제로’입니다. 이전 알파고에서는 15만 건의 기보로부터 3,000만개의 수를 입력받아 지도학습 방식으로 학습하여 스스로 새로운 전략을 발견하고 바둑에서 이기는 법을 학습했습니다. 반면 알파고 제로는 인간이 만든 기보나 수를 전혀 학습에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바둑 규칙만을 가지고 자가 대국을 두며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의 도움 없이 스스로 바둑 이치를 터득해 나갔습니다. 인간으로부터 전혀 배운 것이 없는 알파고 제로는 인간의 선입견과 한계로부터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 덕분에 자신만의 독특한 정석을 개발했습니다. 여러 가지 다양한 변수가 아직 존재하지만 원점(Zero Base)에서 학습시킨 지 불과 몇 시간 만에 이전 알파고 버전과 인간을 뛰어 넘었다‘는 사실은 인공지능의 미래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로 할 수 있습니다.
2012년에 나왔던‘인류종말보고서’라는 한국 영화가 있었습니다. 인류종말에 대해 40분짜리 세 가지 에피소드: 바이러스 확산, 인공지능, 행성충돌 등으로 구성된 영화였지요. 인공지능에 관한 에피소드에는 종교 수행을 하는 인공지능이 상징적으로 등장합니다. 인공지능이 완벽한 종교적 수행을 했을 때, 그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그에게는 수행을 그르치게 만드는 인간 수행자가 갖고 있는 욕정은 전혀 없겠지요. 영화에서 수행자 로봇은 스스로 회로를 모든 끊고 자살을 선택합니다.
만일 기독교의 모든 진리 체계를 입력하고 최고의 경건을 수행하는 인공지능의 결말은 어떤 모습일까요? 제 생각에는 아마도 오작동으로 끝날 거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철저하게 자기 수행을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논리적 모순이 있지요. 자기부정 종교에 자기수행을 프로그래밍을 한다면 거긴 당연히 결과가 없습니다.
1. 자기부인의 끝에서 만난 예수
오늘 성경의 요절이라고 할 수 있는 20절의“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는 말씀은 19절 맥락을 통해서 보면 율법과 관계가 있음을 알수있습니다. 여기서 율법은‘완벽한 윤리법’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율법의 기준으로 우리는 죄인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율법이 법관이라면 우리는 모두 사형에 해당할 겁니다. 그렇지만 피고가 죽었다면 그 재판은 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이것이‘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표현의 의미입니다.
신자에게 부활의 소망이 없다면 우리의 존재는 죽음으로 끝납니다. 타락의 끝에서도 죽음이고 수행의 끝에서도 죽음입니다. 다른 면에서 이 말씀은 신자에게 소망이 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율법의 효력을 없애버립니다.‘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함은‘나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으심을 믿는 것‘입니다.
신자가‘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것은 우리가 거룩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의롭다고 간주하고 대우해준다는 뜻입니다. 구원이란 하나님께서 신자를 깨끗하고 의롭게 만들어 준다는 뜻이 아니라, 단지 그 사람을 거룩하고 의롭다고 인정해주고, 판단하고, 대우해 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율법이 정죄하는‘나 자신의’마지막 한 조각까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에 못박을때 비로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살 수 있습니다.
2. 약함으로 강함
고린도후서 12:10은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신자들도 고난을 당합니다. 질병과 불행한 일을 만납니다. 때로는 죄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믿고 의지하는 이유는, 나의 죽음이, 내 안에 있는 연약함이 하나님의 능력이 머무는 도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 연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내 안에 머물게 됩니다. 그 능력을 통해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성공인생의 열쇄는 고난의 유무가 아니라 영향력에 있습니다.
바울에게는 고통스러운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모자라서 육체의 가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가 족한 가운데도 고난은 있습니다. 육체의 가시를 하나님은 저주라거나 불청객이라거나 사라져야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은혜라고 말씀합니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약한데서 온전해지기 때문입니다. 연약함은 하나님의 능력이 머무는 도구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너무 어려워서 떠나기도 하고, 너무 풍족해서 떠나기도 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오면서 어느 때에 겸손하고 진실했습니까? 성공과 실패, 건강과 질병, 언제 였습니까?”
인생길에서 모든 일들이 잘 되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자신의 능력과 노력으로 된 것처럼 생각합니다. 교만해집니다. 그러나 비참한 현실이 다가오면 겸손해지고 진실해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받아들입니다. 고난당할 때는 아프고 괴롭습니다. 그러나 그 아픔을 견디면서 더 성숙해지고, 더 고결해지고, 더 그리스도인다워지게 됩니다.
3. 다른 삶을 살아라
우리는 종종“어떻게 내가 자기 중심의 삶에서 탈피할 수 있을까?’ 라고 묻습니다. 그 질문은 단순하며 하나의 답만 존재합니다.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신자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이르지 못하는 원인 중 한 가지가 있습니다. 율법의 저주가 그리스도와 힘께 죽지 않은 모든 것 위에 임한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시림들은 죄의 저주에 대해 말히지만, 그들의 모든 본성이 죄로 인해 오염되었고, 저주가 모든 시람 위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우리의 지성은 어떻습니까? 지성이 죄로 인해 더럽혀진 모습은 끔찍할 정도입니다. 그리고 죄의 저주는 그 위에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지성과 명석함과 문화와 정신적인 고상함을 믿고 의지함으로 인해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지혜와 지식으로 복음을 믿으려고 하지만, 사람들은 세상의 영에게 그 십자가의 흔적을 도난당하고 맙니다.
죄의 저주는 본성에 속한 모든 것에 임합니다. 설교하는 것을 기뻐하는 목회자가 있다고 합시다. 그는 최선을 다해서 그 일을 하고, 재능과 사고를 사용히는 데 있어서 최고의 실력을 발휘하는 자인데, 이렇게 묻는다고 합시다.“이것도 죽어야 합니까?’대답은 언제나 그렇습니다. 우리가 수행하는 거룩한 일이 우리의 본성이 거룩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랑과 감사의 감정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린아이가 그의 어머니를 시링히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무엇일까요? 그러나 그 사랑의 본성에도 그 내면에는 거룩하지 않고 성회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이 죽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죽음에서 일으키시고, 다시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고 거룩해진 모습으로 돌려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 전체를 내어드려야 합니다.
예를들어 배 한 척이 출항할 모든 준비를 갖춘 채 부두에 정박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종이 울리고 출항 명령이 내려졌습니다.“출항!”그때 마지막 밧줄이 풀어지고 기선이 움직입니다. 먀찬가지로 우리를 이 땅에 묶고, 육신적인 삶에 묶고, 자이가 주도하는 삶에 묶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신자들에게 메시지가 전해집니다.“네가 예수와 힘께 죽고자 하면 지금 출발하라!”모든 세상의 묶음을 풀고 떠날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자기부인의 도전은 이제 다른 삶을 살라는 도전입니다. 그것은 절대 슬픈 일이 아닙니다. 최고의 가치, 최고의 선택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필요한 일은 ‘내’가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자아가 결부되어 있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죽어야 합니다. 보상없이 주어지는 생명을 향해 떠나면 됩니다.
누가복음 23장에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현장에 한 강도가 있었습니다. 죽음을 앞둔 몇 시간 전에 그는 예수님께 자신의 삶을 맡겼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해주소서!”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복된 약속이 주어집니다.
(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싱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존재할 것인가 행동할 것인가
보이드라는 장교학교의 교관이 있었습니다. 아주 뛰어난 젊은 장교를 만나서 그는 그런 말을 해주었습니다. “언젠가 자네는 갈림길 앞에 설 것이고 거기에서 가고 싶은 방향이 어느 쪽인지 결정하게 될 거네. 이쪽으로 가면 자네는 중요한 사람이 될 수 있네. 그런데 타협해야 할 것이고 또 친구를 배반해야 할 수 도 있네. 하지만 출세한 사람들이 모인 클럽의 회원이 될 것이고 승진에 승진을 거듭할걸세. 또 좋은 임무를 맡게 될 걸세. 그런데 다른 길로 갈 수도 있네. 이 길로 가면 자네는 중요한 일을 할 수 있네. 조국과 우리 공군, 그리고 자네 자신을 위한 일이네. 만일 자네가 그 일을 하고 싶다고 마음을 먹으면, 승진을 못할 수도 있고 좋은 임무를 맡지 못할 수도 있어. 때로는 상관의 마음에 꼭드는 부하가 되지 못할 걸세. 그러나 이 길을 가면 자지 자신과 타협하지 않아도 된다네. 친구들을 배신하지 않아도 되고, 그렇게 되면 자네가 하는 일도 소중한 성과를 낼 걸세. 중요한 사람이 될 것인가 중요한 일을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