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3일 주일예배
온유함으로 살기
마태복음 5:1-12, 마태복음 11:1-6
들어가는 말
‘어느 독일인의 삶’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독일 나치 선전부장 1942년부터 1945년까지, 인류 역사상 가장 중대한 범죄자들 중 하나인 요제프 괴벨스를 위해 비서로 일했던 브룬힐데 폼젤의 증언을 정치학자 토레 D. 한젠이 정리한 책입니다. 1942년부터 1945년까지 괴벨스의 비서로 일했던 폼젤은 이 책에서 자신은 그 당시 나치의 만행을 전혀 알지 못했다고 주장합니다. 나치 정권의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충직한 태도를 보인 전범의 비서가 106세 노인이 되어 의 마지막 순간에 들려주는 회고는 오늘의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줄까요?
나치 선전부의 속기사였던 그녀가 풀어놓는 이야기는 악의 평범성에 대한 통찰을 보여 줍니다. 폼젤은 자신이 나치 가담자였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신은 철저히 비정치적이었고 그 당시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단지 직장, 의무감, 소속감에 대한 욕구였다는 것이 그녀의 항변입니다. 나치 만행의 규모와 잔학성은 종전 뒤에야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1930년대 베를린의 한 젊은 여성으로 나는 정치에 관심이 없었어요. 히틀러는 새로운 인물이었고, 나는 약간 선택받은 느낌이었습니다. 거기서 일하는 것이 만족스러웠고, 모든 것이 편하고 마음에 들었어요. 자신이 맡은 일에서 어떻게든 잘해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그렇게 잘못되고 이기적인 일인가요? 우리는 단지 근시안적이고 무관심했을 뿐입니다. 몰락의 순간까지도 충성을 했고 아무것도 몰랐어요. 난 책임이 없습니다.”
나치의 전범들, 일제 치하에 공무집행을 했던 사람들, 공산 치하에 당원이 되었던 사람들, 그들은 하나 같이 변명합니다.’ 자신들은 상부의 명령에 복종했을 뿐이라고…’ 제도화된 거대한 폭력 아래 감히 거부하지 못하는 힘없는 개인들 뿐이었다고…
마치 해적선에 타서 갑판에서 탈취 전투가 벌어지는 때, 최선을 다해 엔진 룸에서 기계를 돌리고 명령대로 움직이는 선원처럼… 우리는 자신의 삶을 정당화 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이 아침마다 마시는 커피 한 잔에 아프리카에서 자행되는 아동학대가 관련되어 있다고 하면 믿겠습니까? 우리가 저가상점에서 파티를 위해 구입하는 풍선 한 봉지가 인도의 아동 노동착취로 만들어진 제품이라면 믿겠습니까? 여러분이 자긍심을 가지고 일하는 세계 최고의 기업이, 제약회사가, 농경회사가 나아가서는 정부가 세계 인류를 대상으로 저지르는 악한 프로젝트에 내가 참여하고 있다면 믿겠습니까?
세상의 모든 조직이 톱니바퀴처럼 얽혀 제도적 폭력 덩어리가 되어 있을 때, 그 속에서 출세, 부귀, 영화, 권력과 명예 그 모든 영역이 보편적인 악으로부터 자유로운 곳은 없습니다. 그 모습을 성경은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이 세상 풍조를 좇아,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즉 불순종의 영을 따르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엡2:1-3)’라 표현합니다.
톨스토이는 ‘신의 나라는 네 안에 있다’라는 책에서 이를 꼬집듯 지적합니다. ‘당신이 만일 제도적인 폭력의 일부가 되어 누군가를 압제했다면 그 이유는 당신도 그 폭력을 원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누구도 폭력으로 황폐해 가는 조직을 책임지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공권력, 자본가, 군부의 폭력아래 제도적 압제에 참여했다면, 그것은 자신의 탐욕, 허영, 비겁함을 만족시키기 위한 의지적 선택이었다는 거지요.
만일 국가 권력의 통수자나 관리로서 거짓말하기를 포기하고 처형과 폭력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부패 성직자가 위선을 포기하고, 자본가가 사기와 금력으로 자신의 재산을 지키기를 포기한다면, 당장에 우리는 모든 지위를 잃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양심에 어긋나는 상황을 거부하지 않고 그 지위에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명백한 의지적 선택이 된다는 겁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문제라면, 삶의 가치관은 세상에 둔 채, 하나님을 성경에 가두어 두고 삶과 신앙이 분리된 모습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절망의 문턱을 향해 질주하는 혼란스러운 세상에 침묵한 채 아무런 영향력 없이 죄악된 세상 구조 속에서 한 몫을 감당하며 (때로는 최선을 다해서…)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제도적 폭력을 거부하고 떠난 사람들, 그 모든 사회적 칭찬과 성취를 의지적으로 버린 사람들, 경건을 위해 모든 것을 잃고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서 압제 당함을 선택한 사람에게 주목합니다(빌3:8).
말발굽에 짓밟히는 들풀처럼 아무런 저항의 힘도 갖지 못한 채, 거대한 폭력의 강한 압제에 눌려 아무런 권리도 주장하지 못하는 비천한 사람들, 성경은 그들을 가리켜 ‘온유한 자’들이라고 표현하면서 ‘그들에게 복이 있다’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권력과 자본이 만든 제도적 폭력에 참여하기를 거부하고 그 압제의 가장 밑바닥을 찾아간 사람들, 그들은 그 삶이 십자가의 길이며, ‘믿음으로 사는 의인의 삶’이라 믿었고, 최고의 복, 지복이라 믿었습니다(빌2:7-8). 이 신앙적 역설의 뜻은 무엇일까요?
1. 하나님 나라의 반전
팔복을 가르치실 때, 복의 조건이 무엇인지 우리가 잘 살펴봐야합니다. 예를 들어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할 때, 가난이 복의 조건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빈자이든 부자이든 천국은 모두에게 열려 있습니다. 비가 모든 땅에 골고루 내리고 햇빛이 모두에게 골고루 비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부요함과 영광의 광채 앞에 세상의 악한 재물은 빛을 잃습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를 부자로 만들어 주는 것이 복이 아니라 가난하더라도 믿음이 있어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들어가 하나님의 회복을 경험하는 것이 복이라 말씀하시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복이 있다 하신 사람들의 복은 그 원인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같은 이치로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또한 그 자체가 복의 조건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 하나님의 회복과 은혜를 입게 될 때 복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팔복에 열거된 사람들 뿐만이 아닙니다. 눈이 안보이는 사람, 외모가 눈에 거슬리는 사람, 몸에서 악취가 나는 사람, 사지가 뒤틀린 사람, 기형인 사람, 당시 보편적인 유대 문화에서는 누군가의 죄 때문에 천벌을 받고 있는 사람이라고 판단했던 그런 의미에서 죄인이었던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버려진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찾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환경 때문에 마음이 낮아진 사람들, 온유한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가깝다고 평가하십니다. 왜냐하면 권력자들 재산가들, 하나님의 존재와 정의를 비웃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복으로부터 가장 먼 위치에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면에서 ‘먼저 된 자’는 하나님 편에서는 가장 ‘나중 된 자’가 될 것입니다. 반면에 가장 나중 된 자는 가장 먼저 된 자가 될 것입니다.
생각의 조정이 필요합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막10:31)’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오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일획천금을 주셔서 부자가 되게 해서, 보란 듯이 잘 살게 해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압제로 눌려 있는 사람의 지위를 권력자의 위치로 올려 주셔서 ‘못된 짓 하는 놈’들을 싹쓸이하고 복수하도록 해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간혹 여기에 대한 오해가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제자들을 보내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자신의 아들들에게 정치적인 권력을 보장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승천하시지 전의 제자들은 ‘당신의 나라를 회복하실 때가 이 때입니까?”하고 질문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그렇게 답했습니다.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11:4-5)” 그 내용은 사역의 처음에도(눅4:18-19) 마지막에도(행1:6-8) 한결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 때 제자들이나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이나 한결 같은 오해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방식이 권력, 금력, 체력 등에 기반을 둔 폭력이 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복’에 있지만, 제자들의 관심은 ‘힘’에 있습니다. 그것은 ‘상황과 처지’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폭력’이라는 힘이 없을 때, 우리의 ‘안전과 보장’은 어디에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베드로의 질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다 포기하고 주님을 따랐을 때, 우리는 무엇을 얻겠습니까?’
2. 온유함으로 살기
우리의 모습이 어떠한 간에, 그 모습 그대로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있고, 하나님의 회복이 이루어질 때는 ‘금세에 있어 그 모든 희생의 몇 배나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으리라’는 말씀이 의미하는 회복은, 우리가 생각하는 ‘권력과 금력, 체력의 회복’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광이 있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갈라디아서 3장은 우리의 믿음에 매우 중요한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어 의인이 된 것처럼 우리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게 될 것입니다(갈3:6,7,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새로운 인류’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삶의 기초는 그리스도 안에서 사회적, 문화적 구분과 편견이 폐지되고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들은 유대인과 헬라인, 종과 자유자, 남자와, 여자 사이에 아무런 차별이 없습니다(갈3:26-29). (골3:10-11)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우리들이 갖고 있었던 그 어떤 편견’들도 적용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작은 생각으로 그 어떤 것을 상상하든지 그곳은 그 이상입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율법의 지도자들은 소위 빛나는 인간들이 – 부자, 배운 사람, 가문 좋은 자, 유명한 자, 힘있는 자 등 – 하나님의 품을 독차지하는 종교적 압제의 사회 질서가 정당화 될 만큼 왜곡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선포는 분명히 그들을 특권의 자리에서 몰아내고, 인간적 자격이 없는 보통 사람들을 예수를 믿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과의 교제 속으로 불러들였습니다(윌라드).
그리스도의 온유함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은 그들을 압제하는 세상의 권력과 유혹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그것을 소유하고자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것에 더 이상 눌리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그 모든 것 보다 그 이상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