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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온유

10월 6일 주일예배

그리스도인의 온유

갈라디아서 5:22-26, 마태복음 5:1-12

들어가는

그리스도인의 성품에 나타나는 성령의 열매 아홉 가지를 매달 하나씩 정해 깊이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이 달에는 ‘온유’에 대해 논해볼 차례가 되었습니다.
‘온유’라는 말의 원어는 πραΰς(프라우스)입니다. 이 단어는 meek, mild, humble등으로 번역되며 성격이 얌전한, 부드러운, 겸손한 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친 소나 말이 마침내 주인에 의해 길 들여질 때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온유는 길들여진 사람의 성품을 말합니다.

민12:3에서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라보다 더하더라”의 ‘온유’는 히브리어로 ‘아나우’라고 하는데 ‘겸손’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아나우)는 ‘아나’(ana)라는 단어에서 파생되었는데, ‘아나’는 ‘괴롭히다/압박하다/굴복하다/비천해지다’ 의미입니다. 즉 온유란, 비천하고 낮아짐에서 오는 온화함입니다. 온유를 이해할 때 ‘비천하다’는 의미를 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온유와 겸손을 거지같은 마음이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온유’라고 말할 때 흔히 우리말 ‘온순함, 점잖음’을 연관지을 수 있습니다마는 ‘성령의 열매’에서 말하는 온유(Meekness)라는 말의 뜻은 좀 더 깊이, 다른 성경들과 관련하여 보면서, 사려 깊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울러 성경에서 말하는 ‘온유’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있어서 여러가지 품고 있는 중요한 뜻들이 있는데, 이 달에는 그 연관된 신앙적인 뜻들을 네 주간에 나누어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첫째는 성경에서 ‘온유’의 뜻은 팔복을 핵심으로 하는 산상수훈의 배경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팔복을 말씀하실 때, 압제로 인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못할 정도로 눌려 있는 상태인 사람들을 가리켜 ‘온유한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윌라드). 그리고 예수님은 이를 가리켜 ‘마카리오스(μακάριος), 지복(至福)의 상태’라고 표현했습니다. 이것이 ‘온유’라는 주제어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맥락입니다.
둘째는 산상수훈이 함의하고 있는 기독교 윤리로서 ‘비폭력과 사랑’의 메시지 중심에 팔복이 있고 그 회중은 ‘소외되고 압제받는 자들’이었습니다.
셋째는 누가복음 4:18-19에는 예수님께서 광야 시험 후, 그 사역의 초기에 선포하셨던 멧세지의 중심에 ‘소외되고 압제받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전하신 복음의 대상은 ‘가난한자, 포로된 자, 눈먼자, 눌린 자’들 이었습니다. 그 모습은 모두 ‘온유한 자’에 투영되고 있습니다.
넷째 ‘온유한 자’의 삶, 어떻게 보면 물질과 성공중심의 세상에서는 그 누구도 관심이 없을 법한 삶에 주님의 초청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1:28-29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1. 온유의 의미

온유의 의미를 가장 잘 시사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사람들은 마태복음 5장 산상수훈의 회중들입니다. 그들은 가난했고, 슬펐고, 압제 당하는 처지에서 정의를 희망하고 있었습니다.
그중에 ‘온유한 자’들이 있습니다. 기독교 사회학자 달라스 윌라드는 ‘하나님의 모략’이라는 책에서 이들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소심하고 약하고 무른 사람들, 남들이 나서서 목소리를 높이면 이들은 뒤로 물러섭니다. 입은 움직이는데 입밖으로는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합니다. 궁지에 몰려도 마땅한 권리도 주장하지 못할 정도로 주눅이 들어 있습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압제 때문입니다. 폭력에 짓눌려 기를 펴지 못하는 사람들, 톨스토이의 작품에 그 몇가지 예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을에 새로 임명된 마름(토지관리의 최하위 담당자)이 농민들을 지독히 괴롭혔다. 노역도 훨씬 많이 시키고 화를 내고 때리는 건 다반사였다. 농민들은 지주에게 찾아가 사정했지만 그걸 알고 마름은 더욱 혹독하게 앙갚음 했다. 견디다 못한 농민들은 마름을 살해하기로 음모를 꾸몄다. 모두 일치 단결해서 마름을 죽이고 입을 다물기로 약속했지만 마름이 나타나자 아무도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오리려 채찍질 당하고 아내를 하녀로 빼앗기기도 했다. 농민들은 분노하고 억울해하지만 마름만 나타나면 그 앞에서 쩔쩔 맸다…(촛불)”

“…끌려 나온 사람은 농민들의 권리를 주장했던, 존경받는 40대 남자였다. 발가벗은 채 벤치에 눕혀 군인들이 그를 때리기 시작했다… 한 대 씩 맞을 때마다 고문을 당하는 농부는 고통을 참지 못해 비명을 질렀고 주위에 모여 있던 군중은 피고문자와 처벌을 위해 선택된 자들의 아내, 어머니, 아이들, 그리고 친척들이 흐느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의식을 잃고 불구가 된 그 남자를 옮긴 뒤, 다른 사람을 끌고 왔다. 군중의 신음과 울음이 더욱 더 커졌지만, 국가 권력의 대표자는 고문을 계속했다…(신의 나라는 네 안에 있다)”

‘바보 이반’이라는 소설도 있습니다. 바보 이반은 공주의 병을 고쳐주고 왕이 욉니다. 하지만 그는 왕이 되어서도 스스로 농사를 지으며 국사는 전혀 돌보지 앖습니다. 군대도 해체하고 병사들을 고향으로 되돌려 보냅니다. 이웃나라가 쳐들어 왔는데 싸우려 하지 않습니다. 싸우기는 커녕 병사들이 달라는 대로 뭐든지 내주었고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이웃나라 병사들도 부끄러워하며 싸울 의지를 잃습니다. 도깨비가 백성들을 돈으로 유혹하고 지식으로 관심을 끌어도 결국 백성들은 그런 일에 환멸을 느끼고 그저 편안하게 자기 밭을 갈며 살아갈 뿐입니다. 바보 이반의 왕국은 톨스토이의 비폭력 무저항 정신을 그대로 실현한 나라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광야에 있을 때, 그곳까지 병고침을 얻기 위해 찾아 왔던 군중들은 대부분 굶주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회로부터 모둔 권리를 상실하고 아무런 능력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 그들의 울음소리는 세상 그 누구도 위로해 줄 수 없을 것 같은 처절한 통곡이었습니다. 폭력의 압제에 짓눌려 기를 펴지 못하는 주눅들은 사람들, 그들 마음에는 그들의 딱한 사정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작은 성의라도 보여줄 수 있는 관리 하나라도 있었으면 하는 희망에 굶주린 사람들이었습니다(마태복음 5:3-6).

 

2. 온유한 자, 복이 있나니…

예수님은 그들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무슨 뜻일까요? 온유한 자’는 철저하게 폭력의 압제에 눌리고 눌려서 감히 자신의 권리를 요청할 용기조차 잃어버리고 어느 덧 압제에 무감각한 자가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탈취당하여 제도적인 절대 가난에 있으면서도 자신들의 경제적 권리를 요청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무고와 누명을 쓰고 억울할 일을 당했지만 그저 슬피 울 뿐, 악한 폭력에 저항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왜 ‘복이 있다’고 하셨을까요?
권력자들에 의해 철저하게 압제당하고 착취를 당하여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그것이 어찌 복이라 할 수 있을까요. 자본가에게 그나마 가진 적은 것 마저도 억울하게 빼앗기고 정의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다고 절규하는 가난한 자의 눈물을 어찌 복이라 할 수 있을까요.
사방에 권력자들과 자본가들의 폭력이 난무하고, 너무나도 폭력적인 사회에서 비폭력과 원수사랑을 논한다는 것은 너무나 추상적입니다. 만일에 성경에서 말씀하는 복음이 이러한 사상적 낭만주의에 지나지 않는다면 복음은 현실을 떠나 허공에 흩날리는 듯한 느낌입니다.
이런 때에 베드로의 질문에 우리는 공감을 합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마19:27)” 이 말씀의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마19:16-30).

어느 날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나와 질문을 합니다.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청년은 계명과 사랑의 과제는 통과합니다. 그러나 재물 포기의 과제는 통과하지 못합니다. 그 앞에 제자들의 질문과 같이 우리는 묻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요. 누구도 하나님의 의의 기준을 통과할 사람은 없습니다. 물론입니다. 팔복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에 부자이기 때문에 거절되는 것도 아니고 가난 때문에 받아들여지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가난한 자, 우는 자, 압제당하는 자, 억울한 자는 하나님 나라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천국에서 큰 자는 ‘어린 아이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입니다(마18:4). ‘하나님 나라는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는 자가 들어갑니다(눅18:19).’

권력자는 권력 때문에 하나님 나라와 충돌합니다. 부자는 재물 때문에 천국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는 회복을 기다립니다. 억울한 자는 하나님의 정의를 희망합니다. 우는 자는 천국의 행복을 소원합니다.
복에 사용된 ‘마카리오스(μακάριος)’라는 헬라어는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의 행복을 일컫는 말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신적 특성을 표현할 때 말하는 지복(至福), 최고의 복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 반전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흘러나오는 공급이 모든 절박한 자들에게 채워질 것입니다.
그 때에 하나님의 손이 낮은 자는 높이고 높은 자는 낮출 것입니다. 약한 자가 강해지고 강한 자가 약해집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것입니다(막10:31).

반전은 위치와 권력의 반전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가난한 자가 부자가 된다 거나, 천한 자가 권력자가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생각과 삶에 개혁이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베드로와 다른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많은 것들이 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으며, 그들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이 정작 하나님 앞에서는 중요합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은 데 대한 ‘상’은 세상적 보상이 아닌 것을 이해하면서 우리 생각의 수정이 필요합니다.

가장 낮은 곳, 비천한 곳에서 변화가 일어날 겁니다. 폭력에 의해 비천한 자가 되고 압제에 길들여진 ‘온유한 자’, 가장 비천한 자리를 예수님은 하늘 보좌를 버리고 찾아오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이루신 희생으로 악으로부터의 승리를 이룹니다.
폭력에 의해 희생당한 사람이 ‘폭력으로 다시 일어나 원수를 갚는 것’ 이 아니라 ‘자기 희생으로 이루는 원수 사랑’이 폭력을 제압하게 될 것임을 ‘십자가의 길’이 보여줍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방법이며, 산상수훈에서 제시하는 ‘하나님의 온전하신 방법’입니다.

(빌립보서 2:6-11)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하버드의 행복에 관한 연구
로버트 월딩어(Robert Waldinger)는 미국 하버드대학교 의과대학 정신과 교수이며 하버드성인개발연구소(Harvard Study of Adult Development) 소장으로서, ‘행복’에 대해서 75년간 추적 연구한 ‘하버드 성인발달연구’의 총책임자입니다.
이 연구에서는 1938년부터 75년간 남성 724명의 인생을 추적해왔습니다. 연구대상에는 하버드대학교에 갓 입학한 학생도 있었고, 보스턴의 가난한 지역에서 사는 소년들도 있었습니다. 해마다 그들의 직업과 가정생활, 건강 상태에 관해 설문하여 종합한 내용들입니다. 최초의 연구대상 724명 중 60여 명이 90대 노인이 되어 생존해 있으며 지금도 연구는 진행되고 있습니다.
연구가 시작되었을 때 연구대상자 모두가 면접을 봤고, 의료검진을 받았으며, 연구자들이 그들의 가정에 방문해 부모님을 인터뷰하기도 했다. 연구 시작 후에는 2년마다 방문조사를 진행했다. 조사는 참가자의 직업, 건강, 결혼과 가정생활, 사회적 성취, 친구관계 등 삶의 전반에 걸쳐 이뤄졌다. 그들의 자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아내와 심각한 고민을 얘기하는 그들의 모습을 촬영하기도 했다. 물론 뇌스캔과 피검사 같은 건강검진도 진행해 왔다.
연구결과는 다음 세가지로 요약되었습니다.
첫째, 사회적 연결은 유익하되 고독은 해롭다는 것이다. 연구 결과, 가족·친구·공동체와의 사회적 연결이 긴밀할수록 더 행복하고, 신체적으로도 건강하며, 더 오래 사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고독은 매우 유해한 것으로 드러났다. 다른 이들로부터 자신이 원하는 것 이상으로 고립되어 있는 사람들은 행복감을 덜 느낄 뿐만 아니라, 중년기에 건강이 더 빨리 악화되고, 뇌 기능이 일찍 저하되며, 외롭지 않은 사람들보다 수명이 짧았다.
둘째, 친구가 얼마나 많은지, 안정적이고 공인된 관계를 갖고 있는지가 아니라, 관계의 질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이다. 이에 대한 근거로 갈등 속에서 사는 것은 우리 몸에 아주 나쁜 것으로 밝혀졌다. 일례로 애정 없이 갈등만 잦은 결혼은 이혼보다 더 건강에 해로울 수 있다고 나타났다. 반면 바람직하고 따뜻한 관계는 건강을 지켜준다는 것이다. 50세에 관계에 대한 만족도가 가장 높은 사람들이 80세에 가장 건강했다. 바람직하고 친밀한 관계가 나이 먹는 고통의 완충제 역할을 해주는 셈이라 하겠다.
셋째, 좋은 관계가 우리의 몸뿐만 아니라 뇌도 보호해준다는 것이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애착으로 단단히 연결된 관계를 가진 80대는 그렇지 않은 80대보다 더 건강했다. 또한 관계를 맺고 있는 상대방이 자신들이 힘들 때면 의지가 되어줄 거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기억력이 더 선명하고 오래 간다고 한다. 반면 관계를 맺고 있는 상대방이 의지가 되지 않는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좀 더 빠른 기억력 감퇴를 보였다.

‘온유한 자’는 압제에 의해 길들여진 사람들입니다. 그 ‘압제’라는 것은 단순한 물리적 폭력에 의한 압제도 있지만 사회적 압제는 더 심각합니다. 우리는 사회체제의 일부분으로 자유롭지 않고 그 시스템과 경쟁의 압제에 언제나 노출되어 있습니다. 미래의 불투명성도 압제로 작용합니다.
톨스토이가 인용한 게르첸의 어록에 그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버린 세계의 벽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공포가 우리를 사로잡고 잇다. 공허하고, 확대된 자유… 가는 방향도 모르고 우리가 어떻게 갈 수 있는가? 무엇을 얻을지도 모르고 어떻게 잃을 수 있는가? … 미래는 바다보다 끔찍하고 거기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것은 환경과 인간이 만들어낸 신기루와 같은 것들이다… 과연 우리는 현대의 문명, 생활양식, 종교, 낡은 도덕을 희생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노력으로 만들어 낸 모든 성과들, 3세기에 걸쳐 자랑해온 성과를 상실할 각오가 있을까? …”
우리는 모두 다모클레스의 칼 아래에 있는 듯 하다고 합니다. 기원전 4세기 시칠리아 시라쿠사의 영주였던 디오니시오스 2세의 측근인물입니니다. 어느 날 디오니시오스는 다모클레스를 호화로운 연회에 초대하여 한 올의 말총에 매달린 칼 아래에 앉혔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영주로서 자신의 권좌는 ‘언제 떨어져 내릴지 모르는 칼 밑에 있는 것 처럼 항상 위기와 불안 속에 유지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현재 우리가 의지하고 살아가고 있는 사회 구조와 제도에 길들여진 ‘온유한 자’들일 수 있습니다. ‘가난한 자, 우는 자, 눌린 자, 억울한 자..’로 시작해서 최고 정치 지도자까지 우리는 ‘다모클레스의 칼’ 아래에서 모두 ‘압제 받는 자’로 살아갑니다. 그 미래를 알지 못하지만, 멈출 수 없이 가속을 받고 있는 열차에 탄 사람들이 마지막 축배를 드는 듯이 우리의 인생이 흘러갑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떠나 인간이 얻은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모두 믿음이 필요합니다.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살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선택한 것이 과학과 기술에 대한 무한 신뢰, 거의 신적인 신뢰, 아니 종교가 되었습니다.
가공할 폭력적 권력을 가지고 나 자신을 압제함에도 불구하고, 거기에서 인간성을 상실하고, 복지에 대한 신앙은 ‘우리의 모든 관계를 대신해주겠다고’ 허무한 약속을 늘어 놓습니다. 현대 생활의 중압감은 우리를 무감각 하게 하고 있지만 우리는 거기를 떠날 수 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반성하고 이제 방향을 돌이켜 하나님의 통치로 돌아오라’는 복음서의 말씀이 생생하게 들려옵니다.

복음의 우선 순위
복음은 은혜로 주어지고 값없이 받습니다. 팔복은 천국을 얻기 위한 조건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하나님의 천국통치가 만인에게 열려 있기 때문에 아무도 팔복에서 제외되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만인에게 평등한 복음이지만, 부자 청년은 돌아 갔고, 제자들은 영접했습니다.
여기에서 누가복음 4:18-19의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 선포하셨던 말씀을 보겠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여기 복음의 내용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난한 자, 포로 된 자, 눈 먼 자, 눌린 자’입니다. 그들에게 복음이 선포되고, 하나님 나라를 영접하고 천국 통치에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자유가 선포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강한 물살 처럼 급하게 밀려들어 ‘가난한 자, 우는 자, 눌린 자, 억울한 자’에게 도달하여 하나님 나라의 깃발을 세웁니다. 물질과 타락의 세력이 무너지고 마지막 심판을 향한 하나님의 교두보가 확보됩니다.

 

3. 아버지의 온전하심 처럼…

팔복은 산상수훈을 이해하는 기초이며 열쇠와 같습니다. 산상수훈이라고 하는 세계로 들어가는 관문과도 같습니다. 논리를 전개하기 위해 화두를 던지는 것이 아니라, 결론적인 서론이며 밖을 내다보는 창문 같습니다. 팔복이 시작된 마태복음 5장은 이렇게 마무리됩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43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