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5일 주일예배
우리는 믿습니다
에베소서 4:11-25, 갈라디아서 1:6-12
들어가는 말
남극에는 수많은 펭귄 떼가 있습니다. 그들에게 자주 나타나는 집단행동이 있습니다. 한 마리가 갑자기 바다로 들어가면 뒤이어 수백 수천 마리의 펭귄들이 줄을 서서 차례로 바다로 들어갑니다. 아무런 판단도 목적도 없습니다. 주변에 있는 친구들이 바다 속으로 들어가니까 덩달아 들어갑니다. 거기에는 질문도 경고도 책망도 없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그룹 씽크(GROUP THINK)’라 하는데, 한 그룹이 똑같은 생각을 갖고 한 방향으로 나가는 것을 뜻합니다. 인간 사회의 모든 집단에는 ‘그룹 씽크’가 있습니다.
충성이라는 주제 중에서 오늘은 ‘우리는 믿습니다’라는 제목을 세웠습니다. 개개인의 모임이 집단이 되지만 집단의 생각이 언제나 구성원 각자의 생각과 같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집단의 생각’은 과연 신뢰할 만한 것일까요?
교회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모임이므로 ‘집단의 생각’이 반영되고 있는 모임입니다. 다양한 형태로,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집단지성과 군중심리가 존재합니다. 그것은 교리나 선교의 형태로 교회 내에서 문화를 형성하며 자리잡게 되는데 이것이 잘못될 경우 교회는 피할 수 없는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현재 우리의 모임이 교회라는 사실을 누구도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향하는 교회 본래의 모습과 ‘현재 우리의 모습’이 일치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확신할 수는 없을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질문합니다. 우리의 ‘집단지성과 감성과 행동’이 믿을 만한지. 우리가 지향하는 교회와 현재 우리 사이에 간격이 있다면 우리는 얼마나 믿을 만한 지 묻습니다.
인류는 동굴시대 수렵생활 때부터 집단지성을 통해 자연과 맞서거나 협력 사냥하는 법을 발전시켜왔습니다. 게다가 과학과 통신의 발달은 필연적으로 지성의 대중화로 연결되고 집단지성이 언제나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집단지성은 언제나 유익하며 건강한 지식일까요?
독일 수학자 군터 뒤크 교수의 ‘왜 우리는 집단에서 바보가 되었는가’ 저서에서 지적합니다. 우리 개인은 자신이 맡은 업무를 훌륭하게 해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똑똑합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집단은 개인 지성의 총합에 미치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습니다. 달성불가능한 목표, 과중한 스트레스, 기계화, 만연한 성과주의, 평가와 통제, 큰 그림을 보지 못하는 좁은 시야, 엇갈리는 커뮤니케이션, 눈가림용 사기와 조작… 오늘날 조직의 작동 방식 곳곳에 도사린 함정이 집단 지성을 가로막고 있다는 겁니다.
1. 집단지성이 아닌 바른 복음
오늘 본문 갈라디아서 1:6-9에는 매절마다 ‘다른 복음’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신자들을 유혹하는 거짓 교사들이었습니다. 갈라디아의 교회들이 거짓 교사들에 의해 그릇된 길로 인도되어지고 있었고 믿는 자들의 영혼은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갈라디아교인들이 하나님 대신 사람들의 호의와 인정을 고하고, 하나님 대신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고자 노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이중적이고 거짓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EBS 다큐멘트리 ‘상황의 힘’에서 실험을 했습니다. 한 사람이 길에 서서 허공을 바라보는 데 아무도 관심이 없습니다. 둘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세 명이 되지 사람들이 일제히 서서 그들이 바라보는 곳을 바라봅니다. 숫자가 더 늘어날 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이에 동참합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본성에 ‘소속되고 싶은 욕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소속되고 싶은 본능은 너문나도 강력하기 때문에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환경과 믿음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땅콩을 쪼개는 더 높은 기술을 습득한 침팬지 무리에 있던 침팬지가 그보다 열등한 기술을 가진 무리에 속하려고 자신이 가진 높은 기술을 포기한다고 합니다. 이 원리가 인간에게도 적용된다는 것이 1950년대 심리학자 솔로몬 애시에 의해 증명되었습니다.
아주 간단한 문제에 모든 사람들이 다 틀린 답을 하니까 자신도 뻔히 아는 답을 틀리게 답하더라는 것입니다. 답을 맞히는 것보다 무리에 속하고 싶은 욕구가 더 크다는 것입니다.
교회도 집단으로서 같은 오류에 빠질 가능성이 언제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1절은 두 종류의 그리스도인에 대해 말합니다. ‘신령한 자’들과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입니다. 그리고 유다1:19절은 ‘육신에 속한 자’ 중에는 ‘성령이 없는 자’ 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교회 내에서 ‘경건치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기롱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이며 자랑하는 말을 내고 이를 위해 아첨한다’고 했습니다(유1:16,18)
(고전 3:1-3)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3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유 1:18-19)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치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하였나니 19 이 사람들은 당을 짓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은 없는 자니라
복음은 교인 총회에서 다수결로 정하는 다수득표 의결사항이 아닙니다. 복음은 ‘4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강조하여 말합니다(갈1:11-12).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2. 집단지성의 성장
교회는 개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함을 받고 거룩하게 불러내신 성도들의 모임’입니다. 교회는 개인이 이루는 사회이며, 신자로 이루어진 ‘거룩한 사회’는 사회학적으로 볼 때 사람들이 모임 집단이며 집단이 갖고 있는 특성들, 즉 집단지성, 집단심리, 집단행동이 보여지는 곳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질문을 합니다. ‘우리는 신뢰할만한가.’
앞서 소개한 뒤크 교수의 지적에 따라 교회를 점검해봅시다. 만일에 교회의 경건과 신앙이 교회에 속한 구성원들의 각자의 신앙의 총합에 미치지 못하고 오히려 퇴보하고, 심지어 타락하고 있다면 그 원인은 무엇일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시스템이 훌륭해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개인들은 안정을 느끼므로 그 교회에 사람들이 더 모이고 있다면(군중심리) 우리는 이 현상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군중심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두 단계의 패턴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다수에 속하고자 하는 정신이고, 둘째는 일단 다수에 속한 다음에는 그 안에 존재하는 소수의 엘리트 그룹에 속하고자 하는 정신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먼저 다수가 가는 방향으로 자신의 방향을 결정한 다음, 그 다수가 인정하는 소수 그룹에 들어가고자 하는 정신이 군중심리라고 합니다. “나는 내 생각을 갖고 살아간다”고 스스로 자부하더라도, 사실상 현대인들은 직장, 자녀 교육, 신앙생활 등 거의 모든 면에서 이러한 두 단계의 패턴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신앙이 선행하지 않는 인간적인 신앙생활은 이 패턴을 벗어나지 못하며, 이것이 다수의 힘으로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미칠 때, 교회가 경건의 동력을 상실하는 것은 정한 이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갈라디아서 1:10-12은 말씀합니다. ‘다른 복음’은 ‘사람에게 기쁨을 주려는 동기’때문에 생겼으며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닌 것입니다. ‘바른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어야 합니다.
각자의 마음 속에 담긴(고전2:16) 그리스도의 복음은 올바로 세워지고 확신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집단의 어리석음’에 빠지지 말고 ‘세속적인 군중심리’에 흔들리지 말고 굳건한 반석위에 선 믿음은 각자 개인에게 영향을 주고 선한 ‘집단지성’을 이루어가고 선한 ‘군중심리’가 되어 각자를 굳게 세워줍니다. 그 무리의 수가 많을 수록 그 무리의 믿음이 확고할 수록 그 속에 속한 이의 믿음은 더욱 확고해집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개인이 아닌 교회에 맡기셨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교회의 신앙은 그 속에 속한 이들의 각자의 신앙의 총합으로 형성됩니다. 믿음이 어린 사람은 그 안에서 견고해지고 낙심한 사람은 그 안에서 다시 세워집니다. 그 굳은 믿음들이 ‘선교하는 교회’의 힘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 에베소서 4:11-16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엡 4:11-15)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3. 집단행동의 성숙
온 교회가 거룩한 ‘집단지성’을 형성해가고 긍정적인 ‘집단감성’으로 열정의 온도가 달라질 때 교회는 강한 능력으로 ‘하나님의 선교’에 뛰어들 수 있습니다. ‘거룩한 자긍심, 영적 자존감’이 분명한 개인들이 이루는 ‘우리’는 그들이 지향하는 ‘거룩한 교회’를 향해 힘차게 전진합니다. 거센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세상의 유혹을 거슬러 경건을 일으킬 수 있는 용기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에베소서 4:17-25은 그 모습에 대해 감동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엡 4:17-25)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18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19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20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21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23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25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골로새서 1:23-25)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25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