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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신뢰성

9월 29일 주일예배

복음의 신뢰성

고린도전서 2:1-10

들어가는

이 달에는 충성이라는 주제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충성’이라는 단어는 ‘신실하다. 변함이 없다. 신뢰할 만하다’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오늘은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신뢰할 만 한지’, ‘복음의 신뢰성’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믿는 대로 복음은 진리이며 근본적으로 복음은 신뢰성이 있다고 받아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믿을만 한가’라고 질문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존 스토트의 표현에 따르면 ‘교회는 메시지의 전달자일 뿐 아니라 그 자체가 메시지의 구현입니다. 복음의 신뢰성을 가시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표지는 그것을 믿고 그대로 사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회중입니다.’
‘전해진 복음’을 받아들이고 회심하고 신앙하는 일은 우리의 삶의 현장과 문화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그 가운데에서 문화와 역동적이고 피할 수 없는 교전이 일어납니다. ‘복음은 당연히 진리’이지만 상황 속에서 변질되지 않아야 하고, 신자의 삶에 가시적으로 보여져야 하며, 삶의 현장에서 시간과 시련을 통해 검증되어야 합니다.
어떤 연극 배우의 말이 생각납니다. “우리는 허구의 작품을 가지고 진짜처럼 연기하는데, 기독교인들은 진리를 가짜처럼 말합니다.”

 

1. 천국복음

복음에는 다양한 측면들이 있습니다. 최근 들어 복음의 공공성에 대한 연구와 토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유는 교회가 세속화를 견디지 못하고 사회와 문화 속에서 윤리와 지도력을 상실하고 있다는 심각한 반성 때문입니다.
복음은 진리로서 변질되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복음의 원형은 무엇인가요? 마가복음 1:15에서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하셨을 때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복음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님의 전하신 복음의 주된 내용은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시작 첫 마디가 ‘천국’이었고(마3:2), 내용이 ‘천국’이었으며(마9:35), 십자가를 앞두고 미래를 향한 가르침이 ‘천국’이었습니다(마24:14).
마태복음 3: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마태복음 9:35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마태복음 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하나님의 나라는 기독교화된 사회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인정하는 사람들의 삶 속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예수님은 겸손하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그분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거나’ ‘들어가거나’ ‘유업으로 받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이 ‘이루고’ ‘확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초월에서 우리에게 ‘오는’ 것이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힘과 지혜를 모아서 하나님 나라를 ‘이룬다면’ 그것은 인간의 나라이고, 인간적이고 내재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인간적이고 내재적인 것에 무슨 진정한 구원의 힘이 있겠습니까? 모든 내재적인 것은 언제나 피조물의 한계성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초월성과 짝을 이루는 하나님 나라의 특징이 은혜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초월에서 우리를 위하여 ‘오는’ 것이지 인간이 ‘이루는’ 것이 아니므로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다만 ‘받는’ 것이고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천국복음’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영적 회복이 이미 왔으며, 또한 미래에 완전한 성취를 앞두고 있으므로 기쁜 소식입니다.
제자들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3에서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다’고 증거하는 데 ‘받고 전함’은 당시 유대교 전승을 신실하게 전달하는 과정을 뜻하는 전문어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복음은 이미 그 내용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구체화 되어 있었습니다.
그 연결고리가 바로 교회입니다.

‘나라’는 국가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국가로서 권력이 존재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권력은 세상의 권력과 같지 않습니다.
엘빈 토플러는 ‘권력이동’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것은 권력의 질이 바뀐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국가에 구테타가 일어나서 새정부가 들어섰다면 권력의 주인이 바뀐 것이지 권력의 내용은 같은 권력입니다. 그런데 국가를 유지하는 힘이 자본에 있다면 자본가의 영향력이 강해지고 기업이 국가를 주고하게 되면 군사력, 즉 폭력의 권력이 자본의 권력으로 바뀐 것이 됩니다. 같은 이치로 정보의 힘 앞에 기업의 자본이 무력해진다면 권력은 정보의 힘으로 이동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를 비교할 때 권력의 질이 다릅니다. 성경의 표현대로 ‘약할 때에 강해지는 것’이 천국의 권력입니다. ‘가난한 자’가 복된 상태라는 것이 천국의 부의 법칙이 됩니다.

팀 켈러의 ‘왕의 십자가’에는 이런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플로리다 대학 역사학 명예교수인 존 서머빌은 강의 중 학생들에게 질문합니다. 밤중에 매우 약해 보이는 할머니가 지갑을 들고 걷고 있습니다. 약한 할머니로부터 지갑을 빼앗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두가지 중 하나입니다. 첫째는 명예를 중시하는 사회에서 그런 짓을 경멸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가문에 먹칠을 하게 됩니다. 약자를 괴롭히면 사회의 지탄을 받습니다. 둘째 이유는 할머니는 약하고 가난해 보입니다. 할머니로부터 돈을 빼앗으면 가족들 손자 손녀가 굶을지도 모릅니다. 할머니의 처지를 생각하면 차마 강도질을 해서는 안됩니다. 서머빌 교수는 질문했습니다. 여러분이 강도질을 하지 않겠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거의 모든 학생들이 두번째 이유를 들었습니다.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것은 기독교의 가치입니다. 여러분은 자신도 모르게 기독교의 가치를 품은 겁니다.’
명예중심의 윤리 체계는 자기중심적인 윤리입니다. 반면, 사랑중심의 윤리는 이타적인 윤리입니다. 명예를 따지면 겸손보다는 자긍심을, 섬김보다는 지배를, 평화보다는 용기를, 검소함 보다는 영광을, 만인에 대한 존중보다는 충성을, 평등보다는 친구에 대한 관대함을 중시합니다.
기독교이전에는 명예와 수치 중심의 윤리체계가 대부분의 문명을 지배했습니다. 학생들은 강의를 듣고 나서야 자신의 도덕이 얼마나 기독교적인지 깨달았습니다. 학생들은 교회와 기독교는 신랄하게 비판했지만, ‘기독교의 가치를 버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사실 그들은 ‘더 깨끗한 기독교’를 요구한 것입니다.

새로운 국가가 세워지면 가치가 바뀝니다. 철학과 목표가 달라집니다. 우선 처리할 리스트가 달라집니다. 옛 질서는 폐지되고 새 질서가 확립됩니다. 누가복음 6장은 그 리스트가 새로운 권력에 의해 뒤집혀진 것을 보여줍니다.
(눅 6:20-22)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21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22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23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눅 6:24-26)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25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크리스천들은 세상이 초라하게 여기는 것을 소중히 여기고 세상이 좋다고 선전하는 것을 의심합니다. 세상이 리스트의 바닥에 처박아 놓은 것이 하나님 나라의 리스트에서는 꼭대기에 앉아 있습니다. 이 세상 나라의 리스트 꼭대기에는 권력과 돈, 성공과 명예가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리스트 꼭대기에는 약함과 가난, 고난과 버림이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리스트가 뒤집혀 있습니다.

그 교회 공동체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상적인 통치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그리하여 세상 통치에 대안적인 사회 현실을 세상에 제시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갖는 사회적 도전은 ‘사회복음, 저항운동, 기독교국가’ 등과는 전혀 다른 국면을 갖고 있습니다.
일부 복음주의자들이 ‘사회복음’에 대한 반발로 교회를 국가정치와 완전히 분리하고 오직 전도와 개인적 자선 행위에 집중하고 사회 정치적 행동을 도외시한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지만, 사실은 교회의 공공성과 ‘공적 복음’이라는 복음의 총체적 국면을 상실한 것 또한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복음은 진리이지만 복음을 가시적으로 보여줄 유일한 표지로서 교회가 타락일로에 있고 윤리적 회복력을 상실할 때, 교회가 전하는 복음은 그 신뢰성을 잃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2. 교회 : 복음이 가시화된 회중

말씀드린 대로 교회는 복음이 가시화된 회중입니다. 진리는 발견한 사람이 없는 한 숨겨진 보석일 뿐입니다. 누군가 발견하고 삶으로 증명하지 않으면 그 때까지는 허구입니다.
물리학은 이 세상에 네가지 에너지가 있다고 합니다. 중력, 전기력, 약력, 강력입니다. 그 네가지 에너지는 우주가 창조될 때 작용했던 힘이었지만 과학자들이 그것을 발견한 것은 최근일 뿐입니다.
교회는 존재 자체로 복음의 필수 요소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모여서 세상에 그러한 통치로 이루어지는 사회의 모델과 결과를 제시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본질상 교회는 선교적이며, 온 창조 세계를 하나님의 영적 통치 아래 통일시키려는 ‘하나님의 선교’ 중심에 위치합니다.
교회의 교리를 설명하는 조직신학에서 교회론과 성령론을 함께 논의하는 것은 ‘교회는 성령 하나님의 사역에 기초’하기 때문입니다.
사도신경에서 우리가 ‘성령을 믿사오며’로 시작하는 성령에 관한 신앙고백의 첫째 줄은 이렇습니다. ‘성령께서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게 하시는 것을 믿습니다.’ 그 뜻은 쉽게 풀어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성령께서 사람들을 구원하셔서 거룩한 교회의 일부가 되게 하심을 믿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이 연결되는 고리가 있습니다. ‘거룩한 교회’는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가 이루어지는 영역, 즉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임했다’고 하실 때의 느낌은 어떤 것일까요? 한 번 상상해봅시다. 거대한 파도가 일어서 바닷가의 도시를 덮칠 때 그 위력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세상을 파멸과 타락의 도시로 만들어 사람들을 죄의 종으로 삼고 있는 사단의 댐이 무너졌습니다. 하나님의 위력이 쓰나미처럼 밀려 들어와 죄악을 모두 초토화시키고 하나님의 통치 아래 둡니다. 최종 심판의 순간은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유보의 시간입니다. 죄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시간입니다(고후6:2).
고린도후서 6:2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전도자들이 세상으로 나가 사람들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나라, 교회의 일원이 되게 합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이 가까웠으니 복음을 믿으라’는 의미입니다(막1:15).
마가복음 1:15에서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3. 십자가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를…

실천되지 않는 진리는 허구일 뿐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역사 속에서 복음은 종종 그렇게 값싼 것 처럼 취급되어 왔습니다. 그것이 때로는 멋지게 보입니다. 진리를 변질시키고 포장했기 때문입니다. 다이아몬드를 멋지게 보이려고 장난감 매직 펜으로 칠하는 바보 같은 일을 현대의 신학자들이 했습니다.
그렉 길버트는 ‘복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저서에서 ‘세 가지 멋진 복음’을 말해줍니다. 첫째는 ‘예수님은 주님이시다’라고 단순히 선포하는 행동입니다. 둘째는, 창조-타락-구속-완성의 과정으로 하나님은 세상을 회복시키신다는 논리입니다. 셋째는, 문화변혁이 복음이라는 견해입니다.
위의 내용들은 물론 그럴 듯하며 멋있게 생각이 됩니다. 현대인들에게 ‘인간의 죄와 십자가의 대속’이라는 진부한 내용보다는 훨씬 설득력 있어 보입니다. 길버트는 이렇게 조목조목 설명합니다.
“예수님은 주님이시다”라고 단순히 선포하는 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어떤 전령이 도시에 들어가서 “시저가 왕이다”라고 선언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으로 들어가 ‘예수님께서 만물을 통치하신다’라고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것과 복음을 받아들이고 죄의 용서를 믿고 회개하고 돌이켜 부활의 능력 가운데 사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창조-타락-구속-완성’으로 설명하는 데에는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인간 구원에 대한 관심이 결여될 때가 종종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복음의 강조점은 인간 구원에 있지 환경 회복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이 구원의 범주가 될 수는 있지만 하나님께서 한 민족을 구원하시고 세상을 새롭게 만들고 있다고 설명하지만,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해 어떻게 그 구속을 이루고 계시는지, 성령께서 죄의 회개와 믿음을 통해 어떻게 인간 구원을 이루고 계시는지를 말하지 않는다면 올바른 복음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사역을 통해 문화가 변혁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복음 자체는 아닙니다. 때로는 일부 변혁주의자들의 호도하는 멧세지에는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라’는 내용보다는 ‘세상을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라’는 내용이 더 많이 발견됩니다. ‘이렇게 사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겁니다.’라고 말하면 기독교는 평범한 종교가 되어버립니다. 그것은 도덕적인 교훈 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 내용들은 물론 그럴 듯하며 멋지다 생각이 듭니다. 현대인들에게‘인간의 죄와 십자가의 대속’이라는 진부한 내용보다는 훨씬 설득력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희생의 십자가’에 근거한 순전한 복음은 그 자체가 최고의 가치를 지닌 진리이므로 위장하거나 포장할 필요가 없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기관으로서 교회가 복음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유일한 표지로서, 삶의 증거를 보이기만 한다면 복음은 신뢰성을 갖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