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2일 주일예배
나는 믿습니다
로마서 1:16-25
들어가는 말
전세계에 언어가 없는 부족은 있어도 종교가 없는 부족은 없다고 합니다(루이스 벌코프). 하나님 존재 사실에 대한 의식을 심어 놓으심으로 본성적으로 인간이 타고나면서 신을 알도록 하셨는데 이것을 신의식이라고 합니다.
신을 의지해야만 살 수 있다는 종교성은 누구나 가지고 있으나 부패되어 우리의 ‘신지식이란 하나님을 무시하고 의심합니다.
우리에게 이런 신지식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신은 존재하는가, 인간은 무엇인가, 우리는 왜 도덕적으로 행해야 하는가? 도덕적 선과 악의 실체는 무엇인가? 나는 왜 사는가? 나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갈것인가? 인간의 보편적인 질문에 우리는 각자 개인적인 답을 가지고 있어야합니다. 어떤 철학교수의 책 중에 “내 삶의 길을 누구에게 묻는가(백승영)”라는 제목이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우주 보편적인 질문에 대한 개인적인 답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 답은 두 가지로 갈립니다. 인간중심적 답이 있고 신중심적 답이 있습니다. 그것은 결국 인간론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인데 사람을 이해할 때 우리 자신은 어떻게 이해하는가.
사람은 모두 다 육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리학적으로 인간은 입자의 조합이고, 화학성분으로 보면 인간은 71%의 물(산소,수소) 18%의 탄소 4%의 질소, 2%의 칼슘 2%의 인, 1%의 칼륨, 0.5%의 나트륨, 0.4%의 염소 0.1% 무언가로 구성되어 있으며, 생물학적으로 인간은 여성의 세포아 남성의 세포가 만나서 세포복제로 성장한 유기체입니다. 그것은 모두 인정하고 아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뿐인가요? 정신은 어디 있으며 감성은 어디 있습니까? 자기가 낳은 자식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는 모성애는 어디 있으며 가족의 사랑은 어디 있습니다. 인생의 의미를 추구하는 마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무신론적 입장에서 보면 정신과 육체로 나누고, 신본적 입장에서는 영혼과 육체로 구분합니다. 물론 성경안에서도 영, 혼, 육으로 나누는 삼분설도 있지만 우리 개혁주의 교회에서는 영혼과 육체로 나누는 이분설을 채택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정의의 하나님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의로우신 심판을 행하시며, 정의로운 하나님이 역시 ‘죄로 가득한 세상을 사랑’하십니다.
‘전쟁하시는 하나님’, ‘어린아이까지도 죽이라고 명하시는 하나님’, ‘질투하시는 하나님’, 성경에는 이해가 안되는 표현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지금 안간의 제한된 세계관 속에 있으므로 ‘폭행을 일삼는 하나님’에게서 ‘사랑의 하나님’을 볼 수 없을 뿐입니다.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에 사랑은 어떻게 실현되는지 우리가 아직 모를 뿐입니다.
최근에 어떤 무신론 역사가의 책을 접했습니다. 반기독교적이고 인본주의적 색채를 띠는 지식인들이 기발한 아이디어로 책을 내면 베스트셀러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유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본성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반신론적 의도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을 믿고 싶지 않은, 혹은 하나님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현대 철학자 토마스 네이글(Thomas Nagel)의 솔직한 말이 있습니다. “나는 무신론이 사실이기를 원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을뿐더러, 당연히 나의 이런 믿음이 옳기를 바랍니다. 즉 나는 하나님이 없기를 원합니다. 나는 우주 가운데 하나님이 존재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대다수 무신론자들은 자신들이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연구를 통해 무신론적 견해를 내놓은 것처럼 보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다른 관점도 있습니다. 무신론자들의 불신앙에는 비이성적 원인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 스스로 갖고 있는 심리적이고 도덕적인 문제로 인해 내심 깊은 곳에서 무신론의 희구가 간절히 자리 잡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폴 존슨은 ‘지식인의 두 얼굴’이라는 책에서 이 점을 신랄하게 지적합니다. 그는 윤리적 도덕적 측면에 초점을 맞춰 지식인들이 인류를 지도할 자격이 있는지 검토했습니다. 지식인들은 그들의 삶을 어떻게 살았는가? 가족과 친구, 동료들에게 얼마나 정직하게 행동했는가? 그들은 성적, 금전적 문제에서 올바르게 행동했는가? 그들은 진실한 말을 하고, 진실한 글을 썼는가? 그들의 주장은 시간과 실천의 시험을 어떻게 견뎌냈는가? 18명의 역사상 유명한 지식인들을 다룬 후에 그는 결론적으로 말합니다. “그들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으니 이런 자들을 앞으로 조심하라”고 합니다. 그는 루소를 ‘위대한 정신병자’로, 마르크스를 ‘저주받은 혁명가’로, 헤밍웨이를 ‘위선과 허위의 바다’ 등으로 표현합니다.
로마서 1:28-32에는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와 비슷한 시각으로 우리의 교회, 현대의 그리스도인들, 나아가서는 기독교인으로서 나 자신을 평가한다고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하나님을 비판하려는 나 자신은 과연 신뢰할 만하며,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나의 믿음은 과연 신뢰할만합니까?
1. 하나님을 믿고 싶습니다
이성적인 무신론자들의 비이성적인 생활, 오늘 성경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18절)’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폴 존슨의 지적처럼 (모든 지식인이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그들이 거짓말쟁이, 바람둥이, 무책임한 아버지, 이기적인 괴물, 분노조절 장애자, 알콜중독, 무절제, 속물근성으로 똘똘 뭉친 인물인데다 이기적이고 자기홍보에 빠진 사람들이라면, 아마도 ‘하나님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심정이 이해가 됩니다.
마찬가지 배경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믿음에 신앙이 아닌 다른 것이 혼합될 가능성이 있을까요? 여기에 대해 유명한 현대 복음주의 신학자 제임스 패커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이렇게 지적합니다 –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을 알아왔고, 안다고 하지만 자기 희생은 버리고, 신앙을 통해 자신이 얻는 것에 관심이 있을 뿐인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직접 아는 것과 들어서 동의하고 있는 것과는 다릅니다. 복음과 교리로 하나님을 진술할 수는 있지만 신앙의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하나님을 많이 알지 못하면서도 하나님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관심과 지식을 명료하게 생각하고 잘 말할 수 있는 능력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같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서도 경건의 이론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대단한 사역자라는 평판은 얻을 수 있지만 하나님은 전혀 모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에 자기중심적인 하나님을 찾고 있다면 무신론자의 신의식 혹은 인본주의적 성경해석으로 진정한 하나님을 찾아가기는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자신에 대해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증거하십니다. 그리고 자신의 말씀에 대해서는 ‘내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일점 일획도 땅에 떨어지지아니하고 다 이룰것이라’고 주장하십니다.
2.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로마서 1:16은 말씀합니다.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 여기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말씀의 뜻은 반신 혹은 무신론적 공격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자신에 대한 진정한 이해, 즉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영혼임을 분명히 하고 우리는 종종 의심과 침체에 빠질 때마다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칼빈은 ‘사람이 자기의 창조주 하나님을 알아야 자기를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은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이심에 있습니다. 성경말씀과 나의 처한 현실에 커다란 괴리감이 생기는 원인은 그 연결고리를 잘못된 곳에서 찾기 때문입니다. 성경과 나, 그 역사적 시간 차이, 거대한 공간의 간격, 계시와 삶의 괴리감을 채워주고 연결해주는 고리는 불면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계시 안에서 시간과 공간의 차이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같은 하나님입니다. 피조물은 변하지만 하나님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생명과 성품, 진리와 목저과 방식들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변하지 않으시므로 성경 시대의 신자들과 우리의 거리감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직접 만났던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이나, 예수님과 함께 지냈던 제자들이나, 오늘날 성령님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가 하나님과의 교제를 체험하는 면에서 더한 것도, 덜한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같은 하나님을 만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자신에 대해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증거하십니다. 그리고 자신의 말씀에 대해서는 ‘내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일점 일획도 땅에 떨어지지아니하고 다 이룰것이라’고 주장하십니다.
3.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오늘 본문 17절은 말씀합니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다시 서론으로 돌아갑니다. 우리는 왜 살며, 왜 도덕적으로 살아야하며, 나는 누구이며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겁니까? 내 인생의 의미는 어디에 있습니까?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영적인 생명을 얻어 영생의 삶을 사는 것이며, 둘째 그 어떤 변화의 시점, 죽음의 순간까지 ‘하나님의 의’에 반응하면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변함없이 거기에 계신 이유 때문입니다.
이교신자들이 가진 바 이방신들은 영적 권세와 변덕스러운 기질을 갖고 있어서 해악을 피하기 위해서는 제물을 바침으로 신들을 달래야합니다. 뇌물로 자신의 신들을 조종해야하므로 갖가지 상업주의 수단들이 동원됩니다.
성경에는 오직 한 하나님만 존재합니다. 전능하신 창조주, 어떤 나쁜 성질도 악의도 없는 오직 한 분의 진정한 하나님만이 존재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정의의 하나님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의로우신 심판을 행하시며, 정의로운 하나님이 역시 ‘죄로 가득한 세상을 사랑’하십니다.
‘전쟁하시는 하나님’, ‘어린아이까지도 죽이라고 명하시는 하나님’, ‘질투하시는 하나님’, 성경에는 이해가 안되는 표현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지금 안간의 제한된 세계관 속에 있으므로 ‘폭행을 일삼는 하나님’에게서 ‘사랑의 하나님’을 볼 수 없을 뿐입니다.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에 사랑은 어떻게 실현되는지 우리가 아직 모를 뿐입니다.
‘나는 믿습니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몇 가지 전제가 필요합니다. 믿음의 주체로서 나의 믿음이 과연 신뢰할 만한가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분명해야 우리는 그렇다면 하나님은 과연 믿을 만한 분인가 물을 수 있을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나는 하나님과 내 영혼을 알기 원한다. 그 밖에는 아무 것도 원치 않는다.’
파스칼은 ‘자신의 비참을 모르고 신을 안다는 것은 오만을 낳는다. 신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비참을 아는 것은 절망을 낳는다’고 했습니다.
때로 우리의 삶이 곤고하고 시련이 찾아올 때, 신앙이 의심의 먹구름에 가려져 낙심이 되고 침체가 찾아올 때,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왜냐하면 신자의 삶은 믿음으로 영적 생명을 얻고 또한 믿음으로 경건의 삶을 살아야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