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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과 충성

9월 1일 주일예배

그리스도인과 충성

히브리서 6:17-20

들어가는

이 달에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에서 ‘충성’이라는 주제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충성은 영어로 Faithfuless 한글 성경에서는 ‘충성, 미쁘다, 성실, 진실’ 등의 표현으로 번역 사용되었습니다.
히브리서 10:23을 개역개정은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라고, 새번역은 ‘또 우리에게 약속하신 분은 신실하시니, 우리는 흔들리지 말고, 우리가 고백하는 그 소망을 굳게 지킵시다.’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우리는 굳건히 지키고자 합니다. 그러나 끝없는 불신과 의심의 벽 앞에 우리의 믿음은 좌절을 거듭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지성은 믿을 만할까요? 그렇지도 못합니다. 성령의 열매의 한 주제인 ‘충성’이 신자에게 도전이며 또한 격려가 될 겁니다.

 

1. 신실하신 하나님

하나님은 변하지 않는 분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속성 중 하나입니다. 만일에 하나님이 변하는 분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는 불변이 보장되어야 합니다.
오늘 성경은 하나님에 관하여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변치 아니하시는 분’이심과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에 근거해서 우리의 믿음, 즉 ‘약속을 믿는 믿음’과 우리의 가진 바 소망은 ‘영혼의 닻’과 같이 우리에게 견고한 신뢰를 줍니다.
에덴부터 시작하여 인류는 끊임없이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거부의 역사를 이어 왔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라고 말할 때(골1:15) 하나님은 인간의 인지와 경험, 즉 가해영역을 초월한다는 뜻입니다. 우주의 질료를 갖고 시공간 속에 갇혀 살아가는 사람의 인지 능력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분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그러한 불가시성 속에 갇힌 하나님은 아닙니다(칸트). 하나님은 ‘감추어진 동시에 또한 나타나신 하나님’입니다(바르트).
의심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의심을 내포하지 않은 신앙은 항체를 갖추지 못한 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태평하게 열심히 사는 크리스챤들은 너무 바쁘거나 무관심해서 믿음의 이유를 둘러싼 까다로운 질문을 던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비극적인 일을 경험하거나 영리한 회의주의자들의 탐색적인 질문에 부닥치면 그제야 스스로 무방비 상태임을 깨닫습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 내면의 의심에 참을성 있게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신앙은 하룻밤 사이에도 무너져 내릴 수 있습니다. 회의는 반드시 긴 성찰을 거쳐 정리되어야 합니다.
세상은 신앙의 양극화가 진행 중입니다. 한쪽은 더 신앙적이 되어가고 다른 한편은 덜 신앙적인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한 때, 세속화된 유럽 국가들을 나머지 세계의 전조로 믿어 의심치 않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에너지가 넘치며 초자연적인 형태의 신앙들이 걸러지거나 한꺼번에 소멸되리라고 예측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과학 기술이 발전하면 세속주의가 따라오게 마련이라는 논리는 이제 폐기되거나 철저하게 재고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유럽에서조차 기독교는 완만하게, 이슬람교는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는 형편이어서 세속화된 미래와 마주할 가능성은 그다지 높지 않아 보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이 사람들이 알 수 있는 방법으로 찾아오신 계시가 바로 예수님입니다(요1:12). ‘예수님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했습니다(골1:15).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로 가게 됩니다(요14:6).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게 됩니다(요3:3-8)
요한복음 1:9-14 예수님에 대한 세상(10절), 자기 백성(11절), 신자(12절)의 반응을 비교해보고 각각의 반응을 설명해봅시다.
(요 1:10-14)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를 들어 엄마는 아기를 사랑하고 아기는 엄마의 사랑을 믿고 의지합니다. 엄마의 사랑은 아기가 자연스럽게 아는 것이지 증명해서 아는 것이 아닌 이치와 같습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를 강하게 격려하고 있습니다. 그 격려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약속과 소망을 바라볼 때 ‘하나님의 변치 않으심’을 함께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절대 거짓말을 할 수 없는 분이므로 ‘영혼의 닻’을 하나님께 내리고 견고한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변치 않으리라 보증하셨고 그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우리의 소망에 위로가 되십니다. 그 소망은 영혼의 닻처럼 튼튼하고 견고하며 절대 실패하지 않습니다.

 

2. 지식의 착각

위의 신앙은 신자들에게는 진리이지만 비신자들에게는 허구입니다(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인류는 역사에서 끊임없이 인간 이성의 지위를 높이고 신으로부터의 자율성을 확보하고자 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지성과 과학은 과연 신뢰할 수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스티분 슬로먼과 필립 페른백은 ‘지성의 착각’이라는 책에서 ‘우리는 너무나 무지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꽤 많이 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개인적으로 알고 기억하는 것은 미미하지만 다른 사람의 머릿 속에 든 지식 마저도 마치 자신의 것이라고 여깁니다. 이것이 ‘집단 지성’ 사회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착각입니다.
1954년 3월1일 태평양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열핵융합 폭탄 실험이 있었습니다. 별명은 슈림프, 암호명 캐슬 브라보 작전이었습니다. 폭발로 3만피트 상공의 B36폭격기는 핵폭발 연기에 휩싸였고 동쪽으로 150Km 떨어진 곳의 어선에 낙진을 뿌려 치명상을 입게 했으며 몇 시간후 낙진 구름이 롱겔라프와 우티리크 환초로 떠내려가 섬을 사람이 살 수 없는 죽음의 땅으로 만들었습니다. 재앙의 원인은 폭발의 위력이 예상보다 훨씬 강력했다는 데 있었습니다. 1945년 히로시마에 투하한 원자폭탄은 16킬로톤의 위력으로 폭발하여 도시 하나를 통째로 날리고 인구 10만명을 살상했습니다. 슈림프는 리틀보이의 1000배에 달하는 15메가톤으로 폭발했고 과학자들의 예상보다 3배나 강했습니다. 과학자들은 슈림프의 주요 성분 중의 하나인 리퓸7의 성질을 잘못 이해한 탓이었습니다.
슈림프 사건은 인간에 대한 본질적인 역설이 담겨있습니다. 인간은 천재적이면서 서툴고, 명석하면서도 어리석습니다. 1911년 원자핵을 발견한 지 불과 40년 만에 메가톤급 핵무기를 개발했습니다. 불을 다스리고 민주주의 사회를 구성하고 달 위에 발을 디디고 유전자 조작 토마토를 만들었습니다. 인간은 짦은 시간에 신을 거역하는 위업을 이루었지만 그 자만심과 무모함의 결과가 어떤지는 알지 못합니다.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비합리적이며 무지합니다.
우리가 날마다 사용하는 물건들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까요. 냉장고, 세탁기, 자동차, 비행기 … 누군가 묻는다면 우리는 안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그 하나 하나에 대해 우리가 안다는 것은 차라리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겁니다.
매년 전 세계 교통사고로 죽는 인구가 138만명입니다.
고대 동굴시대를 살던 수렵 채집인은 자기 옷을 만들고 성냥없이 불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들보다 현대인들은 많이 안다고 자부하지만 실제로 오지에 떨어졌을 때 생존을 위한 지식은 얼마나 갖고 있을까요. 오늘날 우리 주변의 멋진 젊은이들이 갑자기 세상이 뒤집어져 황량한 벌판에 홀로 생존한다면 내년 먹을 양식을 위해 씨를 뿌려야 한다는 생각을 몇 명이나 할 수 있을까요. 엄격히 현대인들은 제도와 문명을 떠나서는 생존능력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당장 휴대폰을 잃어버리면 중요한 사람은 고사하고 집전화번호도 기억 못하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정보사회 개인의 지식은 인공지능 스피커나 인터넷이 소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무지합니다.
‘지식의 착각’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 한 가지를 소개하겠습니다.
도널드 램즈벨트가 아는 것에 대해 세 가지 유형을 구분했습니다. “알려진 앎이 있습니다. 안다는 것을 안다는 뜻입니다. 알려진 무지가 있습니다. 모르는 것을 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알려지지 않은 무지가 있습니다. 모른다는 것을 모른다는 뜻입니다.”
알려진 앎은 감당할 수 있습니다. 어려울 수는 있지만 적어도 무엇을 대비해야 하는지는 분명합니다. 적이 공격할 것이라고 안다면 대비할 수 있습니다. 미래예측은 숙명적인 일을 점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의 통계로 예측을 하고 대비를 하면 됩니다. 모르는 것을 안다는 것은 대책이 없습니다. 미국이 테러를 당하는 것은 알았지만 2001년 9월11일 세계무역센터가 항공기가 미사일이 되어 공격할 것이라고는 누구도 몰랐습니다. 지진이 생기고 쯔나미가 발생하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알려지지 않은 무지의 상황은 언제나 벌어집니다. 수학에서는 이런 복잡성을 프랙털 fractal이라고 합니다. 숲이 수많은 나무로 이루어지고 나무는 수많은 가지로 이루어지고 가지는 수많은 나뭇잎으로 이루어지고 나뭇잎은 혈관처럼 뻩어나간 모세관을 이루어졌고 각 모세관에는 수많은 세포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컴퓨터과학자들은 이처럼 끝없이 늘어나는 정보의 요구를 조합적 폭발 combinatoril explosion이라고 합니다. 카오스 이론 chaos theory가 있습니다. 어떤 과정의 미미한 시작이 어마어마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중국에서 나비의 작은 날갯짓이 미국에서는 허리케인이 될 수 있다는 비유가 있습니다. 특별하지 않은 사소한 우연에서 역사의 큰 사건이 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사건의 원인과 과정을 모두 이해하지 못합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에 관한 논의는 어떨까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인간의 근원에 대해 안다고 열을 올리는 지식인들의 앎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요.
이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이 욥기 38-39장에 있습니다. 그 이후 40장 1-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또 욥에게 일러 말씀하시되 트집 잡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을 탓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내가 한 번 말하였사온즉 다시는 더 대답하지 아니하겠나이다”

 

3. 충성: 행복의 기초

리처드 코독의 ‘해피니스 업그레이드’라는 제목의 소설이 있습니다. 한 쇠락해가는 소프트웨어 회사의 이야기입니다. 거기에 세가지 믿음이 언급됩니다. 첫째 외부인이 우리를 믿는 것, 둘째 우리가 스스로를 믿는 것, 셋째 내가 우리를 믿는 것입니다. 신뢰는 생명과 같습니다. 믿음이 회복되면서 행복이 업그레이드됩니다.
국가의 신용평가가 떨어지면 실물경제의 손실로 이어지고, 국민들의 삶이 힘들어지면서 사회의 행복도가 하락합니다. 신용이 낮은 사회에서 불안과 함께 산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 아닙니다. 믿음의 보장이 있어야 우리는 의미 있는 일에 헌신할 수 있고, 그 기초로부터 행복을 추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칸트가 우리에게 던지는 227가지 질문’이라는 책에 보면 다섯번째 질문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나는 도대체 어떤 근거에서 행동합니까?” “나는 두가지 근거에서 행동합니다. 나는 도덕적 근거에서 행동하든지, 아니면 행복, 부 그리고 건강을 위하여 행동합니다. 나의 이성이 욕망, 소망, 충동 그리고 본능의 욕구에 봉사하든지, 아니면 역으로 내가 자연적 본성과 자연적 본성의 맹목적인 반응을 현명하고 실천적인 이성법칙을 통해 지배하고 극복하고 정돈합니다. 따라서 내가 자연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사물이나 기계처럼 움직이든지, 아니면 내가 이성법칙에 따라 인간이나 인격처럼 행동합니다.”
성경은 우리를 격려합니다. 우리의 믿는 바 약속을 신뢰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그 뜻을 변치 않습니다.’ 우리의 가진 소망은 영혼의 닻과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합니다. 그 신뢰성 가운데에 신자는 이생에서 ‘생명을 얻되 더 풍성히 얻는’ 행복가운데 살아갑니다. 죽음과 부활을 지나서 ‘예수님께서 휘장 가운데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히10:20)’을 통하여 하나님의 집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요14:1).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고전 15:57-5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