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믿습니다

9월 8일 주일예배

그들은 믿습니다

사도행전 11:19-30

들어가는

지난주에 우리는 ‘충성’이라는 말이 ‘신실함, 즉 변치 않으므로 신뢰할 수 있는 성품’이라는 뜻으로 이해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신뢰성 Credibility’은 요즘 단어로 신용이며, 이는 곧 믿음으로 연결됩니다.

신용에는 개인의 신용이 있고, 국가의 신용이 있습니다. 신용평가회사에서 매기는 개인의 신용점수가 있고 국제사회에서 매기는 국가의 신용평가가 있습니다. 각자 나름대로의 기준을 가지고 개인과 국가의 신용점수를 정하게 됩니다.

초대교회는 지도자를 선정할 때 기준이 있었고, 당시 사회는 나름대로의 기준으로 초대교회와 제자들을 평가하였고, 결과적으로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 명칭을 얻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사회 속에서 교회’는 무엇이며, 사람들은 교회에 대해 무엇을 믿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제자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칭함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오늘 우리가 교회에 관하여 생각해볼 때 ‘세상 속의 교회’ 즉 ‘교회가 갖고 있는 사회적이고 윤리적인 특성’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교회에 관한 논의를 할 때 이것은 일부분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오늘 본문에서만에서도 우리는 교회의 다양한 특성들을 보게 됩니다. 예를 들면;

  • 교회는 개혁적입니다. 스스로를 개혁하면서 세상의 변혁을 주도합니다. 당시 교회의 성장은 주로 유대인들과 회당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첫번째 이방인교회로 안디옥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 교회는 증거적입니다.
  • 교회는 교육적입니다.
  • 교회는 팀사역입니다.
  • 교회는 교리적입니다.
  • 교회는 영적입니다.
  • 교회는 사회 참여적입니다.

 

1. 제자입니까

한국교회 안에 ‘가나안성도’라는 용어가 이제는 보편적으로 들릴 정도로 그 존재가 꽤 넓게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신앙은 있지만 교회는 나가지 않고 스스로는 그리스도인이라 칭합니다. 이 현상을 단순히 ‘교회의 타락’과 ‘잘못된 신앙 행태’라는 윤리적인 것으로 밀어 둘수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현상은 이미 교회 역사에 오래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독일교회에서도 이미 오래 전에 ‘거리를 둔 그리스도인distanzierte Christen’, 즉 신앙은 있으나 교회의 예배에 참여하지 않거나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연구가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신앙이 없는 것이 아니라 단지 교회라고 하는 종교적 기관과 거리를 두고자 했던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국가교회를 지향하는 독일교회와 한국교회가 같은 문제로 보기는 어렵지만 일말 공유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26절은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일컬음을 받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 교회는 커다란 변화를 겪고 있었습니다. 첫째는 복음이 유대인 중심에서 이방으로 전파되면서 세계화가 되고 있었고, 둘째는 이방사회에서 유대교와는 다른 기독교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해가고 있었습니다. 이 때에 이방사회 안디옥에서는 ‘제자들의’ 무엇을 평가하여 처음으로 ‘기독교인’이라 일컫게 되었을까요?

첫째는 그들의 믿는 바 교리였고, 둘째는 교리의 실천 즉 윤리였습니다. 이방사회 안디옥은 제자들이 ‘유대교인’과 다르다고 평가했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 ‘크리스챤’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유대인’과 구별하여 이방사회가 규정했던 ‘제자들’이었습니다. 세상은 우리에게서 올바른 믿음의 내용을 보고 싶어합니다. 믿음이 생명이 되어있는 사람들, 믿음이 혼탁한 세상속에서 별처럼 빛나는 사람입니다.

존 스토트의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라는 책에 보면 그가 신자가 된 이유 첫번째 장은 예수님의 선택과 부르심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시인의 말을 인용해서 그는 예수님을 ‘천국의 사냥개’라고 부릅니다. 끊임없이 찾고 또 찾는 모습, 잃은 양을 놓고 포기하지 않는 모습,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찾으시는 예수님의 열정 때문에 나는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내용이 되어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묻습니다. ‘당신은 제자입니까’

 

2. 지식의 착각

교회는 분명히 세상 속에 존재하며 거기에 의미를 두고 있으며, 가히 ‘세속 한가운데에 있는 거룩한 모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손봉호, 나는 누구인가). 그것이 세상이 교회를 향해 갖고 있는 기대이며 믿음입니다. 그들은 교회가 거룩하기를 기대하고 믿고 있습니다. 생각과 행동이 세속과 구별되어 거룩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교회를 향해 그들은 주저없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존경과 함께 칭송을 보냅니다. 비록 그들은 그렇게 하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제자로서 믿는 바가 분명해야 하며 그 신조는 온전해야 합니다. 존 스토트는 ‘현대사회문제와 그리스도인의 책임’이라는 책에서 비기독교 사회에서 교회는 그 교리의 온전함을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18세기 유럽과 미국, 두 대륙 모두를 뒤흔들어 놓은 복음주의 신앙부흥운동은 사회에 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역사가들은 영국이 프랑스와 같은 유혈혁명의 공포를 겪지 않았던 것은 웨슬리의 영향이었다고 말합니다. ‘웨슬리의 부흥운동은 전세계의 자유 추구 정신과 가치기준의 진정한 유모였으며, 진정한 도덕적 분수령은 때로는 조롱당하기까지하는 신앙부흥운동이었다’(브레디, 복음주의 신앙부흥운동과 사회개혁).

교회는 다섯 가지 교리의 온전성을 회복해야합니다(존 스토트).

  • 하나님에 대한 더 온전한 교리
  • 인간에 대한 더 온전한 교리
  • 그리스도에 대한 더 온전한 교리
  • 구원에 대한 더 온전한 교리
  • 교회에 대한 더 온전한 교리

 

3. 그들은 믿습니다

내가 예수를 몰랐을 때,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을 때, 우리의 오직 하나의 소망은 예수였습니다. 나를 찾아오신 하나님 밖에는 우리의 간증은 없습니다. ‘내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 물을 때 수만 가지의 답변을 늘어놓더라도 가장 앞에 있어야할 대답은 배로 이것입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리셨다’는 것입니다(엡2:4-5).

마찬가지 이치에서 세상의 오직 하나의 소망은 교회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세상의 희망은 교회가 갖고 있는 거룩성에 있습니다. 거룩한 믿음과 거룩한 행위입니다. 세속성이라고는 조금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거룩함을 우리는 유지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무슨 용기로 우리에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요구하셨을까요? (벧전 1:16, 레11:45)

이것이 세상이 지금의 우리 교회를 향해 가지는 믿음이요 기대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희망입니다.

레오니다스 프로아노(Leonidas Proano)는 라오밤바 지역의 주교였습니다. 그는 성경에 근거를 두고 정부에 맞서서 인디언들을 위한 투쟁을 했습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니었지만 국가의 정치와 타락한 교회에 비판적이고 도전적이었습니다. 그는 토지 소유주들과 독재 권력에 대항했고, 암살의 위협 속에 있었습니다. 1973년 칠레의 알렌데 대통령의 패망 이후, 그는 퀴토(Quito)에서 학생들을 위한 집회에서 설교를 했는데, 그는 예수님을 복음을 전파했을 뿐만 아니라, 어려움을 당하는 자들에게 따뜻한 봉사를 하며 가난한 자를 사랑하는 사람, 억압된 사람을 위해 투쟁했고, 체제의 비판자로 묘사했습니다. 집회가 끝나고 학생들이 그에게 나왔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예수님을 미리 알았더라면 결코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교회가 가지고 있는 예수는 어떤 내용이며, 우리는 어떤 예수를 전하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