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행실

8월 25일 주일예배

착한 행실

마태복음 5:13-20

들어가는

오늘은 선에 대한 마지막 주제로 ‘공공선 Common Good’에 대하여 생각해보겠습니다.
공공선 Common Good이란 개인을 포함하는 사회 전체, 또는 온 인류를 위한 선(善)이라 정의할 수 있습니다.
‘공공선’이란 단어는 쓰임에 따라 두가지 의미로 해석됩니다. ‘국익’과 공동체를 수호하기 위해 개인의 희생을 감수할 수 있다는 입장과, 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선’을 추구해야 한다는 개별성을 강조하기 위해 쓰이기도 합니다.
‘왜 도덕인가’의 저자 마이클 샌델의 견해를 따르면, 공공선은 도덕성을 기반으로 한 ‘자존심’이 지켜질 때 확보될 수 있습니다. 어느 것이든 한 쪽으로만 지나치게 강조될 경우, 전체주의나 개인의 파편화로 흐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국사회에서는 오랫동안 공공선과 도덕성이 충돌해왔습니다. 한국 근대사 전체를 걸쳐 주역들은 수도 없이 바뀌었지만 그 어느 하나 ‘애국’이라는 공공선을 이용하지 않은 정부가 없었고, 한결같이 개인의 공공선은 희생당했습니다. 사회의 도덕성과 자존감은 말할 수 없이 손상을 입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편협성은 삶의 형태가 혼란스럽고, 근원이 불안정하며 전통이 완성되지 않은 곳에서 창궐한다고 합니다. 사회나 공동체 혹은 교회가 지속적인 도덕적 타락과 ‘자존감의 결여’를 경험할 때는 그 자본경제와 정치권력의 성향을 지켜보아야 합니다.
“대중사회를 견디기 힘들게 만드는 것은 그 구성원들의 수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살아가는 세상이 그들을 결집하고 관계하고 분리하는 힘을 잃었다는 사실입니다.” (한나 아렌트)
오늘 ‘도덕성이 결여된 공공선의 폐해 모델’을 말라기에서 살펴보고 성경적인 공공선과 도덕성에 대해 바른 해석을 찾아보고 우리의 실천으로서 ‘선한 행실’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1. 도덕성의 회복

말라기 3장에는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십일조에 관한 교훈이 들어있습니다. 우선 그 내용을 보겠습니다.

(말라기 3:7-9)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열조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도다 8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9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났으니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백성들은 우리가 어떻게 해야 돌아가겠습니까 반문합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나의 것을 도적질했는데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고 하십니다. 지금 이 책망의 대상은 말라기 2:1에 보면 ‘제사장’들입니다. 제사장들은 ‘백성들의 십일조와 헌물’을 관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성전의 ‘십일조와 헌물’로 드려진 양식들을 훔쳤습니다.

이 말씀은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백성들에게 한 말이 아니라 ‘십일조와 헌물’을 관리하는 제사장들의 타락을 말하는 것입니다. 공공선을 관리하는 주체가 부패하고 타락했을 때 그 사회의 도덕성과 자존감은 더 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성경에서 봉헌은 ‘헌물’과 ‘연보’가 있습니다. 헌물은 예배를 위한 기본경비를 사용하고 구제를 위해 사용합니다. ‘연보’는 구제를 위해 준비하였다가 회집할 때에 모아서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것입니다. 만일에 그 헌금들을 받아 사용하는 주체가 재정사용에 불투명하고 부정부패와 타락에 연루되어 있다면 누가 거기에 헌금하고 싶겠습니까?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근거’는 ‘경건한 삶’에 있습니다. 십일조를 포함한 봉헌과 연보에는 반드시 그 ‘드리는 자의 신앙과 삶’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일조를 교훈하실 때 ‘십일조는 폐지되었으니 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마태복음 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공공선의 주체인 정부, 기업, 교회가 타락했을 때, 그 사회의 피폐함은 이루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말라기 3:14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광고수단이 되어가고 있는 학교

마케터들이 학교로 몰려가는 이유는 거기에 ‘돈이 있기 때문’입니다. 6-19세 소비자들이 쓰는 돈에 덧붙여 그들이 부모를 졸라 소비하는 돈까지 추산하면 이 아이들은 한 해에 4,850억 달러를 씁니다.

광고기업들이 아무리 뛰어난 수준과 질을 갖춘 학습자료를 지원해준다해도 상업광고는 여전히 유해합니다. 그것은 학교의 존재 이유와 목적 자체를 훼손하기 때문입니다. 광고는 물건에 대한 소유욕을 부추깁니다. 교육의 목적은 그 욕구를 돌아보고 자제하도록 이끄는 것입니다. 광고의 목적은 소비자를 최대한 끌어 당기는 것이며 공교육의 목적은 제대로 된 시민을 길러내는 것입니다.

 

2. 내게로 돌아오라

말라기 3:7은 말씀합니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말라기 3:11절은 신명기 28장의 축복과 저주를 요약한 듯 하고, 12절의 회복의 약속은 역대하 7:14의 약속을 보는 듯합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이 세상의 풍속은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본질 상 진노의 자녀’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엡2:2-3). 세상에서 추구하는 인위적인 공공선에서는 진정한 의미의 도덕적 회복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성경의 입장입니다. 우리가 돌아갈 곳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 밖에는 회복의 소망이 없습니다.

 

3. 선한 행실의 빛

오늘 본문의 마태복음 5:14-16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신자들의 착한 행실은 자신과 사회에 복을 가져다 줍니다. 도덕성에 근거를 둔 ‘사회의 자존감’ 즉 사회를 행복하게 해주는 힘이 됩니다. 어둔 곳에 빛이 되어 비추며, 하나님의 영광과 선을 이루도록 만들어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