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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행과 기쁨

8월 11일 주일예배

선행과 기쁨

마태복음 5:10-20

들어가는

지난주에 우리는 인간선의 기준이요 절정으로서 최고선으로서의 ‘하나님의 선’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선이란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에 부합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의 삶에 있어서 ‘선행’이란 ‘절대 가능하지 않은 어떤 것’일까요? 그렇다면 ‘선한 삶’을 살고자 할 때 그 뜻은 과연 무엇일까요?
오늘 성경 본문은 이에 대한 큰 청사진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성도를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비유하면서 이는 ‘성도의 착한 행실’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율법을 폐지하시지 않고 완전케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실천과 윤리는 마땅히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상위에 있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본문 이후 22절부터는 그 율법의 확대 적용에 관하여 강조합니다.

 

1. 하나님의 선과 성도의 기쁨

소요리문답 제1문을 봅시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라고 답합니다.
간단하게 풀어 설명한다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계획과 의도에 부합하는 각자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즉 ‘선하게 사는 것’입니다.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란 ‘선한 삶’을 통해 ‘영원한 기쁨을 알고 그것을 즐기는 것입니다.’
‘선한 삶’을 어렵고 고통스러운 복종의 삶으로 표현하고 있지 않고 ‘영원히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음을 주지하셔야합니다. 부정적이지 않고 긍정적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선한 삶이란 영원한 기쁨을 즐기는 것’입니다.

 

2. 기쁨의 신학

성경적인 의미의 기쁨을 재정의해보겠습니다. 존 파이퍼 목사는 이를 ‘기독교 쾌락주의’라 말했고, 예일대학교 신학부의 미로슬라브 볼프 교수는 ‘기쁨의 신학’이라 일컫습니다. 기쁨의 신학이란 ‘인간의 삶에 있어서 기쁨의 위치와 본질을 추구하려는 신학적 노력’입니다.
종교적 관점에서 말하는 기쁨은 일반적 의미에서 행복과 어떻게 다릅니까?
오늘날의 행복은 일반적으로 어떠한 종류든 자신이 얻는 즐거운 감정에 대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에 반해 성경적 기쁨이라면 성경적 의미로 특화된 행복, 즉 기독교적 의미에서 구체화 된 것입니다. 무엇이든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음으로 즐거운 감정에 빠지는 일반적 의미의 행복과 비교하여 ‘하나님의 선함을 얻음으로 – 하나님의 계획에 부합함으로 얻는 영원한 기쁨을 즐기게 되는 종교적 행복’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열심히 일하면 일한 댓가로 일정한 수입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거기에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고 별다른 기쁨을 얻는다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일한 만큼 보상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연말에 예상치 않았던 보너스를 받았다면 기쁨이 생길 겁니다. 그것이 이윤을 추구하는 회사에서 주는 것이라면 어떤 형식으로든 상호이익을 기초로하는 동기가 있을 법하지만, 이기적인 동기가 전혀 없는 ‘신적 차원의 아무런 값없이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값없이 주시는 은혜’라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은혜에 의한 회복과 기쁨’을 보여주는 예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 잃은 양의 비유입니다. 목자는 아흔아홉마리의 양의 무리를 두고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고 찾고 나서 큰 기쁨 중에 돌아옵니다. 둘째는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입니다. 여인은 동전 한 개를 잃어버렸다가 많은 노력을 들여 결국 그것을 찾고는 크게 기뻐합니다. 셋째는 탕자의 비유입니다. 집떠난 아들이 돌아오자 아버지는 잔치를 열고 크게 기뻐합니다. 이 이야기들 속에는 넘치는 기쁨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들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 본질이란 근본적으로 우리의 신앙이 우리가 무엇을 행하거나 이루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라, 기쁨의 소식에 관한 것, 즉 우리가 아닌 누군가가 우리를 위해서 이룬 무엇에 관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바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벗어나, 우리 자신보다 큰 무엇에 참여해야 한다는 요구’로 연결됩니다. 거기에 기독교 윤리의 기초가 있습니다.
내가 들은 기쁨의 소식, 나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다고 하는 것, 내가 그리스도안에서 생명을 얻었더는 것은 기쁨의 소식이며 실존적인 생명의 체험이 됩니다. 내가 기쁨의 소식을 전한다는 것은 단순한 메신저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이 바탕이 되어 생명을 나누는 헌신’의 실천적 의미임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3. 기쁨에 깃든 의미 – 선행

단순히 무엇이 기쁨을 가져오는가에 관한 것 뿐만아니라, ‘과연 기쁨 안에는 무엇이 깃들어 있는가’에 관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가령 고난과 같은 것들, 헌신과 희생에 관한 것들이 함께 있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너희가 고난과 핍박을 받을 때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일반적인 의미의 기쁨을 경험합니다. 어떤 이루기 어려운 목표를 이루었을 때 성취감이 기쁨이 됩니다. 자신이나 자식이 어떤 큰 출세를 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큰 자긍심을 얻게 되고 큰 기쁨이 됩니다. 그러나 많은 심리학자들의 의견에 비추어 볼 때 이러한 감정들은 대부분이 자기비하의 감정이나 열등감 등과 연결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러한 기쁨들은 오래가지 않고, 영원과도 관계가 없습니다.
누구라도 기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많든 적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인생에 있어 기쁨을 경험합니다. 아마도 하나님에 대한 질문이 의미가 있는 지점은, ‘우리가 어떻게 기쁨의 상태를 조성할 것인가? 혹은 우리가 어떻게 다가오는 기쁨을 맞이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할 때 일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맺는 관계’에 더 무게를 두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맺으시는 관계’는 ‘내가 하나님께 맺는 관계’에 선행하기 때문입니다. ‘나로부터 시작된 하나님과의 관계’는 기쁨을 풍성하게 하고 확장하게도 하지만 동시에, 뒤틀린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기쁨을 질식 시킬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기초한 선행은 기쁨을 더욱 꽃피우게 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 없이도 기뻐할 수는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 없이도 많은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기쁨은 지속적이지 않습니다. 행복은 삶의 의미와 윤리로 이어져야 합니다.
진정한 기쁨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으로부터 빠져나와, 기쁨을 누리고 우리 자신을 단순히 생존해있음이 아닌, 살아있음에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 줍니다.
내가 지금 행복을 느낀다면,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기쁨에 깃든 의미가 무엇인가요? 단순히 행복한 감정이 최종 목적지라면 그것은 신기루처럼 안개처럼 없어집니다. 다가오는 행복을 어떻게 맞을까요? 거기로부터 의미와 윤리를 찾아보십시오. 그러한 지속성을 줄 때 그 기쁨이 진정한 기쁨으로서 선행과 윤리의 기쁨으로 이어지게 합니다.

언젠가 소개해드렸던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에 나오는 인물 레빈은 그의 인생의 어느 시점, 모든 것이 안정되고 평안한 시기가 되었을 때 불현듯 스스로 질문을 합니다. 사람에게 인생은 과연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 죽음은 무엇인가 등의 질문을 하게 되는데, 그러다가 어느 날 들에서 농부를 만납니다. 그는 질문합니다. 어떻게 살아야합니까? 농부는 대답합니다. 그저 선하게 살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