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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행과 경계

8월 18일 주일예배

선행과 경계

누가복음 10:25-37

들어가는

“물에 빠진 사람 건져주면 내 보따리 내놓으라 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극한 곤경에 빠진 사람을 도와주면 감사해야 한다는 생각이 보편적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 건져주면 고맙다는 사람도 있지만, 거꾸로 내 보따리 훔쳐간 도둑 취급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면 감사하지 않는 사람은 건지지 말아야 할까요? 이기적인 입장에서 보면 건져주고 싶지 않지만 윤리적인 면에서는 건져 주어야 합니다.

다른 예로, 어떤 사람이 물에 빠졌습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구해주었습니다. 도움을 받은 사람은 너무 감사해서 명함을 주고 꼭 찾아오라고 인사를 했습니다. 어느 날 그 사람이 사무실로 찾아왔습니다. 내가 어려운 처지이니 도와 달라고 합니다. 생명의 은인이니 성의껏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서 또 찾아왔습니다. 계속 주기적으로 찾아와 도움을 청합니다. 어떻게 할까요?

선함의 의미와 경계를 정하는 일은 매우 어렵습니다. 그 균형점을 찾기도 쉽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선함과 관계하여 몇 가지 경계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 신앙과 실천의 경계, 둘째 선행 대상의 경계, 셋째 편견의 경계, 넷째 종족의 경계, 다섯째 선행과 생활의 경계 등입니다. 오늘은 선행의 경계와 균형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1. 선행의 경계

본문을 통하여 선행과 관계하여 몇 가지 경계점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신앙과 실천의 경계입니다. 어느 날 율법사가 예수님께 나와 질문합니다. ‘어떻게 영생을 얻습니까?’ 예수님은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나님을 향한 신앙은 실천으로 이어져야 함을 가르치십니다.

둘째, 선행 대상의 경계입니다. ‘그러면 그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질문합니다. 누구에게 선행을 해야할까요? 하나님께서 ‘선인과 악인’ 모두에게 은혜를 베푸시 듯,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선행을 해아하는지요.

셋째, 편견의 경계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로 드신 스토리에는 제사장과 레위인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사회적 편견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율법에는 민6:11, 학2:13 제사장은 시체를 만질 것을 삼가하고, 시체를 만진 자가 다른 물건을 만지면 부정해진다 평가하므로, 제사를 섬기는 제사장과 레위인이 강도만나 ‘거반 죽은 자’를 돕겠다고 만지는 일은 ‘불편한 결과’를 감수하는 일어었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그대로 지나가는 것’이 정당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넷째, 종족의 경계입니다. 문화 인류학은 지구상의 모든 종족이 각기 다른 ‘선’의 기준을 갖고 있다고 말합니다. 한 곳에서는 ‘선’이 다른 곳에서는 ‘악’이 될 수 있습니다. 한 문화에서는 ‘정의’가 다른 문화에서는 ‘불의’가 될 수 있습니다.

다섯째, 신앙과 생활의 경계입니다. 사마리아인은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었지만 곧 자기의 일을 위해 그곳을 떠납니다. 선행은 엄연한 율법의 명령이지만 ‘풀타임 직업’은 아닙니다.

 

2. 경계에 선 착한 사람

‘착한 딸 콤플렉스’라는 책이 있습니다(하인즈 피터 로어). 타인의 시선에 자신을 맞추기 때문에 항상 남의 시선, 남의 평가에 지독히도 신경 쓰며 정작 스스로의 욕망은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러니 그들의 인생이 우울하고 고달파지는 건 당연지사입니다.

교회에서는 ‘성도 콤플렉스’라고 가히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자가 아닌데 성자처럼 행동해야 하는 것이 교회의 일반 상식입니다. 목회자나 교회 중직자들이 모두 앓고 있는 병입니다. 선한 마음에서 필요를 채워주고자 하지만 언제 어떻게 거절해야 할지 난감합니다.  교회에서 지도자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보살펴야 하고 베풀어야 합니다. 우리는 착하게 살아야 하고, 기독교인이라 더욱이 착해야 합니다.

그러한 라이프 스타일이 부담스럽고 심지어 미워 지기도 합니다. 내 할 일을 못하고 손해를 보면서까지 애를 썼는데 상대는 끝도 없이 요구하기만 합니다. 잘 못하면 이기적인 것 같아 죄책감까지 듭니다.

헨리 클라우드와 존 타운센드 박사의 공저 ‘바운더리스 Boundaries’ 우리말로는 ‘No라고 말할 줄 아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습니다.

경계(Boundaries)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효과적인 대인관계를 위해 No라고 말하는 법을 가르칩니다. No하면 미움 받고 대인관계는 나빠질 것 같은 데 오히려 건강한 대인관계의 방법이라고 말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경계선은 모호합니다. 가까워진다는 의미는 이 경계선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부부는 하나이어야 하는데 남편과 아내 사이에 지나친 경계 의식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끝나는 시간이 분명한 목장 모임은 왠지 야박하고,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느라 심방을 꺼리는 목회자도 왠지 정이 없습니다.

 

3. 건강한 경계인

중요한 것은 건강한 균형입니다. 우리는 경계를 통해서 “좋은 것은 받아들이고 나쁜 것은 버립니다. 진주는 안쪽에, 돼지는 바깥쪽에 있도록 분류합니다(마 7:6). 지속적이고 심한 학대를 받았던 사람들은 건강한 경계를 지키는데 어려움을 가집니다. 오히려 나쁜 것을 선택하고 좋은 것은 내버립니다. 그리스도인의 선행은 주로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돕는 일’입니다. 모든 사람, 심지어는 ‘악한 사람의 악한 요청’을 거절하지 못하는 것은 ‘균형 잡힌 선행’이 아닙니다.

Yes와 No의 건강한 균형을 알지 못하면 나쁜 것을 거절하는 용기도 알지 못합니다. 나쁜 것이나 지나친 요구에 No 하는 것은 건강한 자아를 가지고 있을 때 가능합니다. 수준 높은 자존감을 가진 사람이 무리한 요구를 거절할 수 있습니다. 악을 거절하는 힘이 있습니다.

요구를 거절할 때 상대방이 자신을 떠날까 봐 두려운 사람은 No하지 못합니다. 친구들이 마약을 건넬 때, 그 무리에서 따돌림 받을까 봐 두려운 아이는 감히 No하지 못합니다. 잠자리를 안 해주면 남자 친구가 떠날까 봐 두려운 자매는 No하지 못합니다. 남자 친구 없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믿으면, 그가 나의 경계를 침범해도 참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너무나 착하고 좋은 목회자로만 남기를 바라면 No 할 수 없습니다. 상대를 기쁘게 하는 것이 최우선인 사람은 No 할 수 없습니다.

헨리 클라우드 박사는 ‘No’의 부정적인 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적인 ‘바운더리’를 설정하여 하나님의 뜻과 나 자신의 뜻을 구별하며, 신앙생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믿는 사람들이 사랑과 겸손을 베푸는데 너무 집중하다보면 하나님의 뜻이 가려 질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모든 영적인 ‘바운더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성경에 근거해야 합니다. 성경에 근거한 ‘No’는 ‘바운더리’를 행사한 본인은 물론 공동체 전체 구성원이 궁극적으로 건강해지는 길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상대의 아픔에 주목했고 자신의 것을 내어주어 보살폈습니다. 생판 모르는 사람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아무 대가 없이 재정적 손실을 감당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일을 돌보기 위해 떠났습니다(눅10:35). 강도 만난 자를 돌보기 위해 자신의 일을 내팽개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균형감이 필요합니다. No 하는 것도 용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