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1일 주일예배
/ 배종덕 목사
사도행전 2:1-13
들어가는 말
현대교회의 특징 중 하나로 교회론의 약화를 들 수 있습니다. 타락해가던 중세교회로부터의 종교개혁은 필수적인 일이었으나 그 부작용으로 교회론이 약해지고 심지어는 무교회주의까지 등장하는 극단을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일부 개신교회가 가진 교회 경시 현상 내지는 무교회주의적 성향은 심각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은 교회와 예배라는 주제로 말씀을 생각해보는 마지막 시간이 될 것입니다. 그 기초는 교회, 성령, 그리고 교회 공동체의 예배입니다.
1. 교회를 이루시는 성령 하나님
우리가 늘 암송하는 ‘사도신경’의 성령에 관한 내용은 이렇습니다.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I believe in the Holy Ghost, the Holy Universal Church, the Communion of Saints, The forgiveness of sins, the resurrection of the body, and the life everlasting.”
성령 하나님을 믿는 바, 첫째는 성령께서 성(聖)교회를 이루시는 것과 그다음은 성도들이 교회로서 하나 되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 있다는 것은 포도나무이신 주님께 가지처럼 붙어있는 것입니다(요15:4). 바울 사도는 이것을 가리켜 ‘접붙임’을 받았다고 표현했습니다(롬11:17). 이 내용을 교회라는 말인 ‘에클레시아’라는 말의 뜻(밖으로 불러내심)과 연관 지어 생각하면 성령께서는 교회를 세우시고 성도를 불러내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와 연합하게 하시고 교회를 이루도록 하십니다.
- 요한복음 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 에베소서 1:23,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2. 교회를 준비시키는 성령 하나님
불이 탐으로 존재하듯 교회는 선교로 존재한다고 합니다(Emil Brunner: Church exists by mission as fire exists by burning.)
그런데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교회를 준비시키는 것이 성령의 사역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1:4)”고 말씀하십니다. 교회의 성령충만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는 것”(행1:8)입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분부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눅 24:49)” 사도행전 1:4-5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성령세례란 세례는 그리스도 안에 죽고 그리스도 안에 사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연합합니다. 부모 없이 태어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기는 태어나는 순간 가족의 일원이 됩니다. 교회가 아닌 성도는 없습니다. 성도는 거듭나는 순간 교회의 일원이 됩니다. 가지가 줄기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교회를 떠난 성도란 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2장에서 교회는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는 데, 개인이 아닌 교회 공동체 전체가 성령으로 충만함을 입게 됩니다. 베드로 사도가 고넬료의 가정에서 말씀을 전할 때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행10:44)” 내려왔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안수할 때 모인 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임했습니다(행19:6-7).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공동체 전체를 성령께서 그 선교 사명을 위해 충만히 임하시고 사명교회로서 첫 출발을 하던 그 자리, 다시 말해서 교회가 교회로서 처음 출발하던 그 시점에 교회의 예배가 있습니다. 공동체의 예배와 성령 충만은 교회가 그 본질로서의 선교 공동체로서 세상을 향해 나가기 위해 성령께서 준비시키시는 일입니다.
3. 세상에 생명을 주는 예배
신학자 알렉산더 슈머만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예배’라는 그의 저서에서 “교회는 선교이며, 선교는 교회의 본질이다”라는 말 앞에 존재하는 것이 바로 예배라고 합니다. 예배는 마법이나 이방신전의 제의가 아닙니다. 예배는 성도들이 이 세상을 떠나 함께 모여 에클레시아(교회)되는 경험입니다. 교회가 교회됨을 이루는 사건이 예배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나라, 천국이 이루어집니다. 예배는 교회가 주님의 기쁨으로 들어가는 일이며, 우리는 이 기쁨의 증인이 됩니다. 교회는 이 기쁨으로 선교하며, 선교의 시작은 교회의 예배에서 시작됩니다.
교회의 표지
교회의 표지란 교회를 규정하는 기준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칼빈은 ‘교회의 표지’로써 1) 말씀선포(verbi praedicatio)와 2) 성례준수(sacramentorum observatio)를 말했습니다(‘기독교강요’ 최종판(1559) 4권 1장 10절). 그리고 사도행전 2:42의 주석에서는 ‘교회의 참되고 진정한 모습이 판별될 수 있는 네 가지 표지들로 교리(doctrina), 기도(preces), 교제(communicatio), 떡을 뗌(fractio panis)을 제시했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 예배가 갖고 있는 소통성입니다. 공동체는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예배자로서 신자의 삶에 존재하는 두 가지 표지입니다. 둘째 예배가 갖고 있는 양면성입니다. 성찬에는 상징으로서 떡과 잔이 있고 의미로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있습니다. 상징과 의미는 반드시 함께 있어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의 영성으로서 예배 없이 선교공동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도 같은 의미를 갖습니다. 내가 갖고 있는 모든 것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나의 삶과 연관되어 있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뜻이 존재함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는 반쪽 신앙을 가진 것입니다.
교회여! 세상에 생명이 되어라
엄마의 태중에서 자라던 아기가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기도가 열리면서 첫번째 숨을 쉬고 울음을 터뜨립니다. 그 때에 출산을 지켜보던 모든 사람이 안심하고 기뻐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죽었던 생명을 구원하여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연합하게 하고 모든 성도가 공동체로 드리는 예배는 아기의 첫 호흡과도 같습니다. 세상에 울림을 주고 기쁨을 주는 거룩한 외침입니다. 그것이 예배이며 선교의 시작입니다.
그리스도의 몸, 즉 공동체의 예배없이 교회의 본질인 선교는 시작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배 속에서 성령께서 교회에 충만하시고, 그 때에 비로소 교회는 세상으로 전진할 준비가 되기 때문입니다.
- 요한계시록 18:4 “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그렇게 하나님께서 불러내셔서 그리스도 안에 있게 하시고 교회의 머리 되신 주님께 우리를 붙여주시고 한 몸으로 하나님 앞에 나와 새 생명을 시작하는 일, 거기에 교회의 예배가 존재합니다.
- 고린도전서 1:9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